[여의춘추-김진홍] 연두와 유리 그리고 민수
입력 2011-09-29 17:47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장애학생 연두와 유리, 민수. 이들은 고아이거나 부모 역시 장애인인 약자 중의 약자다. 이들이 수년간 학교 안에서 또는 밖에서 교장과 교사 등에게 무자비하게 성폭행을 당한다. 용기를 내 고발했지만 가해자들은 든든한 자금을 동원해 무거운 처벌을 피해간다. 가해자들은 “정의는 승리한다”고 소리치며 양주를 들이켜고, 연두와 유리 민수는 굵은 눈물을 쏟아낸다.
상상 속의 일이 아니다. 청각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인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도가니’ 줄거리다.
점점 거세지는 ‘도가니’ 열풍
“‘도가니’는 관객들이 불편하라고 만든 영화입니다.” 황동혁 감독의 말이다. 조금 과장된 면이 없지 않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그 원인은 복합적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저토록 유린당하는 장애아들이 있는가라는 탄식, 인면수심의 죄를 지은 쓰레기 같은 이들을 경찰과 검찰 판사 변호사 교육청이 한통속으로 감싸는 우리 사회 부조리에 대한 분노,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는 과연 장애아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는 지금까지의 무관심에 대한 자괴,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제2 제3의 연두와 유리 그리고 민수가 고통 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 등등….
‘도가니’ 열풍이 거세다. 여론에 민감한 정치권은 복지재단의 족벌경영 방지 등을 위해 사회복지사업법(일명 ‘도가니 방지법’) 개정안을 처리할 태세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법안도 제출됐다. 광주시교육청은 인화학교 폐교를 검토 중이고, 경찰은 경찰청 직속 지능범죄수사대 수사관 5명을 광주로 급파해 재수사에 착수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전국 41개 특수학교에 다니는 장애 학생들 생활실태 점검에 나섰다. 법원은 당시 가해자들에 대한 양형 이유를 해명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도가니’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뒷북 대응들이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벌써부터 든다. 지난해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김수철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정부와 정치권은 요란법석을 떨었으나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어떤가. 요즘도 아동 대상 성폭행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장애아를 포함한 아동의 안전을 담보하는 실질적인 대책이 마련되는지 ‘도가니’ 관객들은 지켜볼 것이다. 아울러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도 확실히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엔 근본적 대책 내놔야
광주 인화학교 홈페이지의 ‘학교장 인사말’에는 “우리 학교는 ‘학교 안의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한 학교’라는 모토로 거듭나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는 달라이 라마의 얘기,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행복하라는 것 한 가지뿐’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얘기도 인용돼 있다. 장애 학생을 성폭행한 교사가 버젓이 근무 중인 학교의 장이 어떻게 ‘행복한 학교’ 운운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피해 학생 중 한 명은 엄마에게 지금도 “원수를 갚아줘”라고 말한다고 한다. “천인공노할 인권유린 사건인 만큼 인화학교를 즉각 폐교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주장에 동의한다. 이미 학생 수도 급감한 데다 교육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조차 상실한 상태 아닌가.
피해 학생들은 집단 치료를 통해 표정은 다소 밝아졌으나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자칫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 자제해야 옳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