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얼굴이 자꾸 생각나”… ‘인천 남편 살해’ 사건의 재구성
입력 2011-09-29 17:51
“남편이 죽어가는 것 같아요. 제발 살려주세요!”
지난 19일 밤 11시50분쯤 인천 간석동 W빌라 앞마당에 한 여자가 털썩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피가 흥건히 묻은 이 여자의 손에선 방울이 맺혀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구급차가 왔고 이 여자의 남편을 싣고 갔다. 목과 오른쪽 어깨 사이에 선명하게 흉기 자국이 난 남편은 이송 도중 숨졌다. 범인은 키가 150㎝쯤 되고 깡마른 이 여자, 울부짖는 아내였다.
19일 밤의 기억
그날 W빌라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내 최숙경(27·가명)씨는 지난 21일 구속됐고, 남편은 사망했기에 그날 일을 기억하는 주민들을 수소문했다. 최씨가 사는 간석동 언덕배기에는 방음이 안 되는 작은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인근에는 남동공단이 있다.
W빌라와 마주하고 있는 30m쯤 떨어진 미니 슈퍼마켓 여주인을 지난 26일 찾아갔다. “가스렌지에서 냄비가 끓는 모양이야. 나는 몰라.” 여주인은 캔 커피를 산 기자에게 거스름돈을 주고선 얼굴을 돌린 채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슈퍼마켓 앞 평상에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동정할 가치가 없어. 남편을 죽였잖아.” 이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다음, 그리고 그 다음 주민에게 물어봐도 다들 시선을 돌려버렸다.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왠지 모를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기 업은 아줌마도 있었다. 같은 빌라에 사는 한 주민은 문을 열었다 닫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사실 그 시간에 그 여자랑 남편 싸우는 소리 들었어. 그 여자, 살려 달라 소리치고. 내 몸 다칠까봐 남의 싸움에 관여 안 했어.”
이 빌라에 사는 주부 A씨만이 기자를 집 안에 들였다. 그리고 그날 밤의 기억을 들려줬다.
“여자 집에서 부부 싸움 소리가 들렸어요. 우리 집은 늘 TV를 크게 트는데도 여자 소리가 뚜렷했으니까. 그 여자가 좀 있다가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렇게 소리를 지르더라고. 아이 우는 소리도 들리고. 여자가 위험한 것 같아서 남편한테 말했어요. 빨리 경찰에 신고하라고. 그랬더니 남편이 괜찮다는 거예요. 남의 부부 싸움에 끼는 거 아니라고. 경찰이 와 봤자 부부 싸움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밖에 더하겠냐고.
좀 있다 문이 열리고 누가 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이가 ‘엄마, 엄마’ 부르면서 울더라고. 부부 싸움하다가 엄마가 혼자 집에서 뛰쳐나가고 남겨진 애는 엄마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이후에 조용해져서 다 해결됐다 싶었지. 그 다음에 (살해) 사건이 일어난 거야.
나는 못 봤는데 그날 빌라 앞에 사람들이 몇 명 모였대요. 그 여자가 황급하게 집 밖으로 뛰쳐나와선 남편이 흉기로 아들이랑 자기를 죽이려 한다면서 신고해 달라고 했다네. 그리고는 애가 걱정됐는지 위험하다면서 다시 집에 들어갔대. 그 뒤에 아내가 남편을 죽였나 봐요.
여기 빌라 주민들이 그날 다 들었대요. 아래층 사는 사람은 흉기에 찔릴까봐 남의 싸움에 안 끼었다고 나한테 그러던데. 아휴, 그 여자 안됐기도 하고. 그래도 다 사는 방법이 있거든. 나도 남편한테 맞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다들 사는 거야.”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19일 남편의 외도 문제로 부부 싸움을 했다고 진술했다. 최씨가 남편의 내연녀로 추정되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냈고, 싸움이 커져 남편이 흉기를 들고 “다 죽여 버리고 깜빵(감옥)에 가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도와 달라고 뛰쳐나갔다 집에 남겨진 아이가 걱정돼 집에 다시 들어왔다. 최씨는 남편이 세 살 아이의 뒷덜미를 잡고 방에서 거실로 끌고 나오는 걸 보고선 아이를 잡아챘다. 이후 흉기로 남편을 찔렀다.
최씨는 그날 밤,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처음엔 자신과 아이를 살려 달라고, 다음엔 남편을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경찰차와 앰뷸런스는 전쟁이 끝난 뒤 도착했다. 아내의 손에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다.
19일 낮의 기억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내는 그날 오전 어떤 일을 했을까.
최씨는 사건 당일 오전 9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한 휴대전화 부품공장에 출근했다. 그가 하는 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형광등 아래에서 휴대전화 부품을 검사하는 것이다. 그날 그는 유독 우울한 표정이었다. 한 번도 자기 속 이야기를 하지 않던 그는 여자 동료인 B씨에게 이제껏 살아온 인생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잠을 못 잤는지 부은 얼굴이었다.
“언니, 나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어. 엄마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도시락 반찬으로 천하장사 소시지를 싸 주셨어. 왜 그거 있잖아. 반찬용 말고, 몇 백 원짜리 애들이 간식으로 먹는 소시지. 고등학교 때는 수학여행 비용이 없어서 아르바이트해서 돈 모아서 갔어. 가난한 게 지긋지긋했어. 학교 졸업하고 회사 다녔는데, 내가 다닌 회사 옆에 이삿짐센터가 있었어. 거기 직원이 지금 남편인데 나한테 음료수도 뽑아 주고 정말 잘해주더라고. 그래서 스물세 살에 일찍 결혼했어.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결혼하곤 만화방을 했어. 임신했는데 출산하기 전날까지 일을 했어. 조그만 병원에서 애 낳았는데 뭔가 잘못됐나봐. 그래서 내가 며칠씩 깨어나지 못했대. 요 근처에 큰 병원 있잖아. ‘길병원’이라고. 거기로 옮겨져선 한 달간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어. 남편은 제대로 돌봐 주지 않았어. PC방에 게임하러 간다고. 산후 조리해 줄 친정 엄마도 없었어. 퇴원하고선 바로 만화방에서 일했어. 아이는 구석에 눕혀 놓고. 언니도 알지? 나 여름에도 춥다고 계속 떨잖아. 아무래도 그 탓인가 봐. 산후 조리 못한 거.
언니, 나 이제껏 제대로 여행 한번 가 본 적이 없다. 남편한테 아기랑 동네 놀이터 한번 놀러 가자고 해도 귀찮대. 얼마 전에 친구랑 아기랑 세 명이서 과천 서울대공원에 놀러 갔는데 진짜 신나는 거 있지? 홈쇼핑 책자 보면 진짜 예쁜 옷도 많이 사고 싶어. 근데 남편이 생활비를 잘 안 줘. 내가 번 돈으로 적금 넣고, 벌어먹고 살아.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는 30만원 내.
나, 원래 점심때마다 집에 가서 밥 먹었잖아. 그런데 요즘 왜 맨날 점심마다 짜장면이며 백반이며 바꿔가면서 사 먹으러 다니는지 알아? 너무 억울해서. 남편에게 다른 사람이 생긴 것 같아. 그 여자한테는 스마트폰도 사 주는데. 억울해서 돈 쓰러 다니려고 일부러 짜장면 먹었어. 그런데 소화가 잘 안 돼. 그래서 점심 먹고 소화제 마시는 거야.
언니, 요즘 소원이 생겼어. 이혼하고 애기랑 둘이서 사는 거. 그래서 몇 달 전부터 적금 들었어. 돈 모으고 대출 받아서 조그만 데라도 전세 들어가려고. 어젯밤에 남편이 집에 안 들어왔어. 남편이 애 뺨을 너무 세게 후려쳐서 나도 모르게 남편 뺨을 때렸거든. 자기도 그러대. 스트레스 받는 거 자꾸 아기한테 푸는 것 같다고. 애 구타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아기가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 그런데 언니,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왜 이렇게 안 좋은 일만 자꾸 생기는 걸까?”
최씨는 B씨에게 한참 얘기했다. 그리곤 오후 6시에 퇴근하면서 박스 두 개를 챙겨 갔다. 남편과 당분간 떨어져 지내기 위해 옷가지를 넣기 위한 박스였다. 그리고 5시간40분 뒤 그는 남편과 영원히 이별했다.
남겨진 인터넷 일기장
최숙경씨는 공장 동료들과 언니, 동생하며 잘 지냈다. “언니, 커피 타다 드려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최씨는 성실한 직원이었다고 최씨가 근무하던 공장 사장은 전했다. 그런데 가끔 우울한 얼굴을 하고선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이 몇 번이나 최씨를 불러도 듣지 못했다.
겁도 많았다고 한다. 공장에서 빌라로 걸어 올라가는 길에 죽은 쥐를 볼 때면 무서워 동료 B씨 뒤에 꼭 숨었고, 공장에 벌레가 나타나면 차마 죽이지 못해 창문 밖으로 풀어줬다. 퇴근할 때면 공장 옆집에 있는 강아지 이름을 부르며 두 발을 잡고 인사를 나누곤 했다.
최씨는 동네에선 ‘베트남 여자’ ‘조금 모자란 여자’라는 헛소문이 났다. 발음이 어눌하고 동네 사람들과 말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천에 있는 실업계 여자고등학교 다닐 땐 반에서 1∼2등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고, 3년 내내 학급에서 반장을 맡았다. KB은행장상도 수상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 모범상을 받은 학생을 대상으로 전교생이 인기투표를 해 단 4명에게만 주는 ‘전체 모범상’도 3학년 때 받았다. 하지만 작은 키와 어눌한 발음 탓인지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없었다.
현재 인터넷상에서 최씨를 위한 탄원서 모집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인천 남편 살해 사건’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는 청원이 올라왔고, 29일 3만5000여명의 네티즌이 서명했다. 그가 4년 전부터 활동해 온 인터넷 육아 커뮤니티에 남긴 글이 뒤늦게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이 커뮤니티에는 사건 전날 남편과 싸운 이야기와 아이에 대한 남편의 폭력, 힘든 결혼생활부터 신혼 때 느낀 행복한 감정까지 다양한 내용이 일기장처럼 쓰여 있다.
“애를 벽에다 몰아 놓고 앉히더니 ‘야, 울지 마. 울지 말라고’ 하면서 애 뺨을 때렸어요.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순간 저도 모르게 신랑 뺨을 때렸어요. 그랬더니 ‘나 쳤냐?’면서 애에게 사정없는 구타를 하는 거예요. 제 온몸 던져 아기를 감싸 안았어요. 아기가 잠들면서 ‘엄마, 아빠가 맴매했어. 아빠 맴매해죠’라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어떻게든 엄마, 아빠 다 있는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2011.9.18)
“처음 글을 써 봐.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 ‘여보, 나 조금만 놀다 올게.’ 이렇게 말하면 ‘만약에 애기 깨면 난 애기 죽여 버릴 거야. 그러니 니 맘대로 해.’ 정말 새장 안에 새도 나보단 나은 삶 살 거야. 난 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너희들은 날 처음 봤지만 앞으로도 자주 놀러 올게. 나 위로 좀 해 주라.” (2010. 9.6)
“어젯밤 12시에 저 일 마치고 게임방에서 게임하는 신랑 데리러 갔어요. 밖에 나가 신랑 기다리면서 괜스레 눈물이 뚝뚝 흐르는 거예요. 신랑이 기다리래서 서러웠던 건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어요.…신랑이 ‘으이그’ 이러면서 뽀뽀를 해 주더라고요. 엉망인 얼굴에 신랑이 뽀뽀해 주니까 내가 왜 이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하고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에 웃음이 나더라고요.” (2007.11.6)
그에게도 잠시나마 행복했던 신혼의 때가 있었다. 최씨는 현재 인천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아이는 먼 친척 손에 맡겨졌다. 최근 면회 온 같은 공장 직원과 육아 커뮤니티 회원에게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차라리 남편 대신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남편 얼굴이 자꾸 생각나.”
충북대 김영희 교수가 법무부 의뢰를 받아 2005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된 남편을 살해한 133명의 아내 중 44%가 남편의 학대를 살해 동기로 꼽았다. 다음은 치정(35.2%)이었다.
인천=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