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비싸다는데… 빨간 김치 대신 초록 김치
입력 2011-09-29 19:20
오죽하면 풋고추를 갈아 김치를 담그자고 하겠는가.
고춧가루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한 요리연구가가 장아찌용으로 나온 값싼 풋고추를 갈아 담근 ‘초록 김치’를 선보였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빨간 김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초록 김치(사진)를 개발한 한국식생활개선연구회 김경분(53) 부회장은 “나름 칼칼하고 깔끔한 게 맛있어요”라고 했지만, 매끼 고춧가루 빠진 김치를 식탁에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즘 고춧가루는 한마디로 ‘금가루’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28일 한국물가협회 홈페이지에 오른 고춧가루 ㎏당 시세를 근(600g)으로 환산해 봤다(고춧가루는 통상 근 단위로 헤아린다). 서울과 부산은 2만700원, 대구는 1만9200원, 대전은 2만4000원이다. 지난주 1만6000∼1만7000원대를 유지하던 고춧가루 가격이 한 주 새 훌쩍 뛰었다. 지난해 같은 시기엔 얼마였을까 찾아보니 근당 1만600원. 딱 두 배 올랐다.
햇고추가 한창 수확되는 8월 말∼9월 초도 아니고, 이른바 ‘막고추(막바지 고추)’철인데 고춧가루값은 계속 오르기만 한다. 왜 이럴까.
전문가들은 우선 고추 수확량 감소를 꼽는다. 올여름 비가 많이 내린 데다 탄저병이 돌아 고추 작황이 형편없었다는 것. 게다가 지난해 가을 태풍의 여파로 막고추 농사를 망쳐 재고도 없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의 ‘건고추 관측 속보’를 보니 고추 총 생산량은 평년보다 28% 줄었고, 태풍으로 생산량이 줄어든 지난해보다도 10% 감소했다.
가수요 심리도 가격폭등을 부추겼다. 고추 작황이 나쁘다는 소식이 연일 전해지면서 소비자들이 고춧가루 구매 시기를 앞당기게 됐고, 수요가 수요를 일으키면서 가격이 올라갔다는 게 유통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 롯데마트의 지난 1∼20일 고춧가루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3% 늘었다. 가격이 두 배 이상 뛴 먹거리의 판매량이 오히려 증가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롯데마트 측은 “아무래도 본격적인 김장 시즌엔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사두려는 소비자들이 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싸다, 비싸다’ 하면 더 오른다. 주부 윤성희(63·서울 삼선동)씨는 “충북 충주 장터에서 고춧가루 한 근에 1만1000원 하던 것이 매스컴의 고추 파동 보도 이후 2만5000원으로 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주부들은 걱정이 많다. 지난해 배추 파동 때보다 올해가 더 심각하다. 보통 김장을 담근다고 하면 네 식구 기준 20∼30포기를 담근다. 이때 들어가는 고춧가루 양은 5∼8근. 15만원 안팎이 든다.
“배추 파동 때가 차라리 낫죠. 고춧가루는 싸게 살 방법이 없잖아요. 단가도 훨씬 높고. 올해는 30포기 담글 돈으로 10포기 겨우 담는다니까. 자식들한테나 나눠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대구 방촌동에 사는 주부 이분례(67)씨의 푸념이다.
할 수 없이 백김치를 더 담고, 파프리카로도 김치를 담가 보지만 빨간 햇고춧가루 듬뿍 들어간 김치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고춧가루값, 언제쯤 내려갈까.
다행히 원재료인 건고추의 가격은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충북 음성, 경북 영양, 전북 임실 등 주요 재배지의 고추 시세는 추석 이후 꺾여 근당 2만∼2만5000원대에서 1만4000원∼2만원 이내까지 떨어졌다. 고추연구소 이동헌 연구원은 “중부지방 아래로는 (가격 상승세가) 다 꺾였다고 보면 된다”며 “막고추가 나오는 마당인데 서울 등 도심에서 시세가 올랐다 하더라도 더 이상 오르긴 힘들다. 결국 내려가게 돼 있다”고 예측했다.
농업관측센터는 10월 중순 이후 고춧가루값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건고추 담당 한은수 연구원은 “건고추값이 떨어져 고춧가루 가격도 동반 하락하게 돼 있다”면서 “소비자들은 수입 고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10월 중순 이후로 구매 시기를 늦추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지난 25일 온라인 중고 직거래 사이트 ‘중고나라’에 오른 고춧가루 판매 글. ‘120근 남았네요. 얼른 사 가세요. 가격 쌀 때···. 신중한 선택이 1년 김치 맛을 좌우합니다.’ 제시된 가격은 근당 2만7000원이었다. 이 가격에 산다면, 주식으로 치면 ‘상투’ 잡는 셈이다.
‘금값 고추’도 한 철이다.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서둘러 사두라는 주변의 채근에 솔깃할 필요 없다. 지금 사면 손해다.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