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9월 30일] 복음을 통한 갈등 해결
입력 2011-09-29 17:38
찬송 :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302장(통 408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21:22~34
블레셋의 족장과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그동안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하면서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 진솔한 대화를 통해 아브라함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대화를 통해 갈등과 반목은 공존과 화해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갈등을 풀어내는 사람들,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대화는 말하는 것과 듣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런 법칙을 제시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속에 들어가 소통을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조약을 맺자고 찾아온 것은 뭔가 아쉬워서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동안 빼앗겼던 우물들을 달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과거의 우물이 자신의 것이었음을 증거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대화하되 양보하려는 정신으로 대화했습니다. 대화를 통해 무언가 얻어내려고만 하면 대화는 결렬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음을 확신할 때 양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땅 분배에서도 양보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입니다. 링컨은 “시비를 가리느라고 개에게 물리느니보다는 차라리 개에게 길을 양보하는 것이 현명하다. 개를 죽여봤자 물린 상처는 치유될 수 없는 법이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상생(相生)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번영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대결구도로 가면서 파워게임을 하려고 합니다. 결과는 공멸입니다. 우리는 다종교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타 종교인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실체를 인정할 때부터 전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무시하려 할 때 무례하게 대하게 되고, 결국은 전도의 문은 막히는 것입니다.
근대주의에서는 오직 ‘나’가 중심이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가치의 판단은 ‘나’였습니다. 그러다가 헤겔의 ‘정반합의 원리’를 통해 변증법의 구도 속에서 ‘나’ 아닌 ‘너’를 통해 통합하려는 정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21세기에는 ‘나’와 ‘너’만이 기준이 아닌 다양한 기준이 생겨났습니다. ‘다원화 시대’ ‘포스트모던’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 다양성의 세계를 빨리 간파해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복음을 확실하게 붙잡아야 상생이 가능합니다. 복음을 확실하게 붙잡으면 그 복음 안에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고, 복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가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하려다가 망했습니다. 정말 자기 민족만이 우수하다면 다른 종족들을 품고 함께 갔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품고, 지도력을 갖고 세상을 주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힘겨루기로 사회가 갈등과 반목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하나 되게 하시고, 그 힘으로 세상을 묶어낼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장경덕 목사(분당 가나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