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기아·대자연… 검은대륙의 실체 정면으로 마주하다
입력 2011-09-29 17:58
‘아프리카 방랑’/폴 서루 / 작가정신
세계적 여행기 저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미국의 폴 서루에게 무지는 아프리카 여행을 충동질한 원동력이었다. 1941년에 태어나 20대 젊은 시절 평화봉사단원으로 말라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아프리카 명사 몇 명을 친구로 가진 그에게도 아프리카는 불가해한 공간이었다.
그를 막은 건 40여년의 시간이었다. 서루가 아프리카에 머물던 1960년대 막 독립한 신생 대륙 아프리카는 희망의 땅이었다. 새 국기가 펄럭이고, 투표권을 얻은 사람들은 새 나라와 새 신발과 새 자전거에 들떠 있었다. 가난했지만 기아는 없었고, 내전은 시작되지 않았다. 분쟁, 대학살, 기아, 에이즈, 소년병. 40여년 뒤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에 저자는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했다. 배낭을 짊어지고 아프리카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지적 탐색이었다.
더불어 그는 사라지고 싶었다. 전화도 이메일도 없고, 아무도 연락할 수 없고,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에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지구상 마지막 오지가 아프리카였다. 과연 그곳에서 서루는 ‘세상에서 사라질’ 위험한 순간들을 넘기며 아프리카를 만난다.
책은 서루가 2000년대 초반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작해 수단,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말라위, 모잠비크,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아프리카 동부 10개국을 위에서 아래로 종단하며 쓴 몇 개월간의 여행기이다.
저자는 모래 폭풍이 치는 사막과 고대 피라미드의 발밑에서 밤을 보내고, ‘출발시간 이외에 별도 시간표는 없는, 운이 좋으면 도착시간이 내일이 될’ 그런 낡은 기차와 닭장버스 가축용트럭 통나무배를 타고 대륙을 방랑했다. ‘화성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사예보’가 매일 이어지는 흙먼지의 도시와 느닷없이 소낙비가 흥건히 쏟아지는 사막의 밤을 견뎌냈다.
여행비자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몇 주간 주 카이로 수단대사관으로 출근했다. “비자가 언제 나올까요?” 서루의 질문에 대사관 직원은 언제나 같은 답을 했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서루의 귀에 이 말은 ‘곧’에서 ‘시간이 되면’으로, 다시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에서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로, 최후에는 ‘어림없지!’ ‘불가능해!’로 변해갔다. 아프리카를 이해해가는 과정이었다.
저자는 오랜 친구 몇 명과도 재회했다. 우간다 수상이 된 은시밤비, 수단 제1정당 당수 사디그 알 마흐디, 노벨문학상 수상자 나기브 마푸즈 등. 덕분에 독자는 엘리트의 입을 통해 아프리카의 목소리를 듣는 호사를 누린다.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귀스타브 플로베르 같은 유럽 작가가 아프리카에 남겨놓은 흔적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 방랑’을 읽으며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저자 서루가 미국인이고, 그가 여행하던 2000년대 초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대테러전쟁이 시작된 시점이라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인들은 낯선 여행객 서루를 향해 ‘부시는 사탄이다’와 ‘미국에 가고 싶다’를 한꺼번에 부르짖었다. 애정과 증오가 뒤섞인 모순된 감정은 미국과 아프리카 대륙이 맺고 있는 관계의 상징이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저자의 균형감각은 이런 대화에서 반짝인다.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하자, 아랍 지식인들이 서루를 추궁한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달래려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쉰한 번째 주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스라엘은 미국의 일부입니다.”
서루가 답한다. “내 생각에 이스라엘은 미국이 중동을 바라보는 창문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작은 창문입니다. 너무 작아 모든 나라를 명확히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몇 줄의 묘사로 독자를 열대의 사막으로 순간이동시키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 다른 모든 걸 뛰어넘는 책의 매력이다.
“고대의 땅을 여행하며 마침내 사막의 텐트에서 처음 밤을 맞이하던 날, 나는 후텁지근한 텐트 안에서 뜨거운 열기에 견디다 못해 발가벗고 누워 숨을 헐떡이며 모기장 너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솔기에 모여든 파리들의 안달하는 몸뚱이가 달빛과 별빛 부스러기에 반짝거렸다. 나는 한없이 행복했다.” 강주헌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