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術·청빈한 삶이란 무엇인가? ‘작은 예수’ 장기려 기념관 세운다

입력 2011-09-28 20:56


부산시와 부산과학기술협의회는 28일 부산시청에서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식을 가졌다. 고신대 복음병원은 오는 11월 장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시아기독병원 지도자대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등은 부산에 장기려기념관을 추진하고 있다. 이날 장 박사가 45년 간 헌신한 부산 암남동 복음병원을 찾았다.

복음병원 3동 2층. 50m 길이 복도 양편엔 장 박사 생전의 사진과 한 사람의 희생, 헌신이 어떻게 1000병상의 대형 병원으로 확장됐는지 보여주는 홍보물이 걸려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 박사는 1943년 국내 최초로 ‘간 대량 절제술’을 성공해 의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으로 행려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본 크리스천이자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해 한국 의료보험 제도의 주춧돌을 놓은 사회사업가이기도 하다.

7층으로 올라가니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폭 60㎝의 가파른 계단이 나왔다. “쐐애애앵.” 엘리베이터 전기실에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맞은편엔 철문이 있었다. ‘張起呂’. 집주인을 알리는 문패가 보였다. 철문을 여니 큼큼한 냄새가 풍겼다. 95년부터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49㎡ 넓이의 장 박사 자택이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흔들의자가 창밖 송도 앞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 중 아내와 5남매를 이북에 둔 채 월남해 이산(離散)의 처절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개인의 영달이나 안위보다 자기희생으로 이웃사랑에 헌신했다. 후대는 그를 ‘바보의사’ ‘참 의사’ ‘성자’라 부른다.

장 박사의 제자인 이충한(60) 외과교수는 “초창기 병원을 운영할 땐 돈 없는 환자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몰래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귀띔까지 할 정도로 순수하셨던 분”이라며 “돈이 없으면 시간이라도 내서 남을 돕는 데는 앞장섰지만 같이 월남한 둘째아들에게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도움으로 잘 살지 않았느냐. 모든 것을 주께서 책임져 주신다’며 철저하셨다”고 회고했다.

오래된 목조가구와 식탁, 옷장 2개, 삐딱하게 기울어진 의자 등은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그는 제자와 교회 성도들이 선물한 옷과 이불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의사가 되게 해 주시면 의사를 한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겠다”고 서원했던 그는 1976년 병원장직을 내려놓고 이곳을 오르내리며 환자 돌보는 데 힘썼다.

윤영일(56) 원목실장은 청빈과 나눔 정신을 후대가 이어받아야 한다고 했다. “원장으로서 재직하면서 부를 축적하려 했으면 충분히 했겠지만 유산이라고 해봐야 결국 1500만원 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간병인에게 절반,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어요. 그 삶이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한결같았던 거죠. 한국교회나 사회나 그런 정신과 삶을 가진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부산=글·사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