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현동] 정치인의 눈물

입력 2011-09-28 17:42


“정치가 눈물로 해결될 리 없고, 경제 또한 눈물로 좋아지지 않는다”

눈물과 카리스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눈물은 감성의 자극인 반면 카리스마는 권위를 확인시키는 힘이다. 감동의 눈물이 있는가 하면 분노의 눈물도 있다. 일반적으로 눈물은 논리가 빈약하고, 합리성도 부족하다. 때론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다.

그러나 눈물만큼 카리스마를 극대화시키는 것도 없다. 강력한 주먹보다, 청중을 매료시키는 명연설보다 눈물이 더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많다. 의외성이 있을 땐 더 그러하다. 눈물이 진정성을 담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눈물이 흔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극적 효과를 노린 대한민국의 ‘눈물정치’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인생역정을 회고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철처럼 단단하고 냉정할 것 같은 노무현의 눈물에서 많은 국민은 자신과 노무현을 동일시했다. ‘공감’이 작동한 것이다. 눈물 덕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솔직히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현직 대통령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 앞에서 눈시울을 적셨다. 간호사들과 광부들도 함께 펑펑 울었다. 가난한 나라의 못난 대통령과 국민들이기에 ‘자괴와 설움’의 눈물이 아닌가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해 천안암 희생자 추모연설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 대통령은 희생자 46명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편히 쉬기를 바란다. 명령한다”는 대목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눈물도 세간의 화제가 됐다. 오 시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을 갖고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에 실패하면 사퇴하겠다고 밝히면서 4차례나 눈물을 보였다. 그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기자회견문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들어야 했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정된 박영선 의원도 눈물을 흘렸다. 박 의원은 지난달 열린 한상대 검찰총장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울먹였다. ‘여전사’ 이미지의 박 의원 눈물은 의외였다.

눈물이 정치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시장 불출마 선언을 하던 날 ‘시골의사’ 박경철씨는 안 원장을 끌어안고 울었다. 대가를 바란 눈물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공감을 느꼈다. 강한 카리스마로 TV 오락프로그램의 황제로 군림해온 강호동씨가 얼마 전 일시 은퇴를 선언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때 천하장사로 모래판을 휘어잡았고, 마이크로 무대를 좌지우지하던 그였기에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탈세로 팬들의 환호가 비난으로 바뀐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의도된 눈물이었는지, 참회의 눈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눈물의 힘 때문이었을까. 이후 그에 대한 비난이 잠잠해졌고 동정론이 제기됐다.

그렇다면 눈물은 정직한 것인가? 정치인, 특히 선거를 앞둔 정치인에게 눈물의 의미는 뭘까? 눈물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방해가 된다. 때론 본질을 덮는다. 정치인으로서야 그걸 노리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동안 극적효과를 기대하는 눈물, 대중의 냉철함을 무디게 하는 눈물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 대가도 혹독히 치렀다.

올해는 서울시장 선거, 내년엔 총선과 대선이 예정돼 있다. 눈물로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눈물로 한 표를 호소하는 정치인에게 미래를 기대하긴 힘들다. 정치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념갈등, 빈부격차, 청년실업 등 수많은 난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위정자를 뽑는 선거가 연기자를 뽑는 것이 아닌 이유다.

눈물이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 결과는 뻔하다. 정치가 눈물로 해결될 리 없고, 경제가 눈물로 좋아지지 않는다.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눈물을 흘릴 게 아니라 백성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박현동 편집국 부국장 hd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