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대통령에 대한 기억
입력 2011-09-28 17:41
노무현은 개혁을 외치며 한국 사회 주류세력에 맞서다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을 당했던 대통령이다. 김대중은 햇볕정책으로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한 대통령이다. 김영삼은 오랜 군사정권을 끝냈고, 하나회를 척결했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했지만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가져온 대통령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세 대통령은 그렇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내 기억은 훨씬 단순해진다. 전두환은 ‘쿠데타 대통령’이고, 노태우는 민주화 물결에 굴복한 ‘6·29 대통령’이다.
기억은 이런 것이다. 다섯 대통령이 재임할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이런 한 줄짜리 기억으로 남는다. 이 한 줄은 그들에 대한 최종 평가가 된다. 여론의 경중을 가려 중요한 것을 걸러내는 언론의 기능을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라 하는데, 사람의 기억만큼 단순하면서 냉정한 게이트키핑이 없다. 개개인의 이런 기억은 역사적 평가로 수렴되고 그 과정에 해당 권력자가 개입할 틈이 없기에 무섭다.
내 경우 한 줄로 요약하기 어려운 대통령은 박정희가 유일하다. 쿠데타 대통령으로 기억하자니 경제성장이 떠오르고, 산업화 대통령으로 정리하자니 그는 분명 민주화에 거스른 독재자였다. 역대 대통령이 다 공과(功過)를 갖고 있지만, 유독 박정희에 대한 기억이 복잡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대통령을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대통령에겐 그런 프리미엄이 없다. 주어진 시간은 5년뿐이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남은 건 1년 반이다.
5년 뒤, 10년 뒤 이 대통령은 어떤 한 줄로 기억될까?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주로 그에게 보냈던 기대를 반영한다. 노무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혁을 외쳤던 사람이다. 뭔가 바뀌리라 기대한 사람들이 표를 던져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과 기존 질서가 충돌한 사건이 탄핵이었기에 그의 ‘한 줄’은 탄핵 대통령이다. 김대중이 ‘IMF 위기를 극복한 대통령’ 대신 ‘남북 정상회담을 한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2위 정동영 후보에게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표차로 압승을 거뒀다. 새 대통령에게 거는 사람들의 기대가 비교적 일치했다는 뜻이며, 그것은 ‘경제 대통령’이었다. 선거 과정에 제기됐던 여러 문제는 ‘성공한 CEO(최고경영자)였으니 경제만큼은 잘하겠지’란 기대에 모두 묻혔다. 취임 후 지지율 그래프도 유독 경제 상황과 밀접하게 연동돼 움직여왔다. 그렇다면 답은 자명하다. 이 대통령을 기억하는 ‘한 줄’은 경제와 관련된 평가일 것이다.
이런 ‘경제 대통령’이 공교롭게 재임 중 두 번이나 경제위기를 맞았다. 2008년 위기는 비교적 잘 넘겼고, 그래서 임기 4년차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40% 후반의 지지율로 시작했다. 지금 두 번째 위기는 2008년보다 상황이 나쁘다. 대응수단이 제한적이고, 국제공조도 원활치 않다. 국정 장악력이 약해지는 임기 후반인 데다 측근 비리마저 터져 레임덕 얘기가 시작됐다.
당연히 지지율은 바닥을 향해 가고 있다. 청와대는 돌파구를 찾고 있을 터이다. 남북 정상회담 같은 대형 이벤트에 손이 갈 때다. 국정 동력을 유지하려 파격적인 어젠다를 구상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뭘 내놓든 이 대통령은 ‘경제를…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측근 비리, 서울시장 선거, 남북 정상회담, 이런 건 어쩌면 ‘대세’에 크게 지장 없는 곁가지다. 남은 1년 반은 무조건 경제 회복에 매달려야 할 시기다. 그래야 ‘경제위기 두 번 극복한 대통령’으로 기억에 남을 수 있다.
태원준 정치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