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교회-경기 평택시 안중교회] 읍내 한가운데… 기도로 우뚝 서다

입력 2011-09-28 18:08


교회도 역사를 써 간다. 그 속에는 교회와 구성원들이 걸어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선대의 기도와 헌신, 눈물과 땀이 배어 있고,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큰 능력도 스며 있다. 후대는 그것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교훈으로 삼는다.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의 안중교회는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나사렛교단) 창립 때부터 교단의 중심에 서서 나름의 역사를 써왔다. 그래서 안중교회는 나사렛교단의 역사이며 얼굴이다. 또한 안중교회는 안중지역 복음화의 중심을 꿋꿋이 지켜왔다. 무려 12개의 국내 지교회와 2개의 해외 교회까지 세우는 힘을 과시했다.

예상 밖이었다. 서울에서 너무 가까웠다. 평택시 안중읍이라는 지명으로 어림잡았던 거리감은 실제와 많이 어긋났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수도권은 아닌데 이미 수도권에 들어와 있었다.

안중교회는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IC에서 10분 이내에 있었다. 서평택IC를 빠져나와 안중5거리까지 간 다음 아산만 쪽으로 우회전해 가다 보면 안중읍 시가지가 나타난다. 안중교회는 그 가운데에 턱하니 버티고 있었다. 안중읍 현화3리 37번지(031-681-3558). 인근에 읍사무소를 비롯한 주요 기관과 단체들이 밀집해 있다. 평택항과 서해대교가 지척에 있다.

거리뿐 아니라 안중교회의 모습 또한 예상 밖이었다. 상가와 주택가 혼재 지역에서 개성적인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붉은색과 흰색의 조화에다 특이한 모양의 십자가탑이 눈에 도드라졌다. 건축에 나름대로 공을 많이 들였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규모 또한 도회지의 웬만한 교회 못지않았다. 웅장하진 않지만 주위를 압도하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교회에서 한달음 거리에는 아파트단지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어 신도시인가 했다. 하지만 고개만 돌리면 곳곳에 논밭이 펼쳐져 있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도농복합지역이었다.

교회로 들어서자 ‘어머니기도회’라고 쓰인 큼지막한 현수막이 맨 먼저 눈에 들었다. 지역사회에서 나름대로 존재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멘트 포장된 마당 겸 주차장에는 승용차 100대는 족히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본당 오른쪽에는 교육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배실을 들어설 때면 누구든 경건해지게 마련. 커다란 목재 문을 밀치고 스위치를 찾아 불을 밝혔다. 넓으면서도 깔끔했다. 엄숙하면서도 아늑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앞쪽에 뭔가가 눈에 띄었다.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 막 11:17)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서둘러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나사렛교단의 모판으로

안중교회 인근에는 성공회와 감리회, 하나님의성회 등 교단들의 또 다른 ‘안중교회’가 여럿 있다. 그래서 자칫 찾을 때 혼동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안중교회는 나사렛 교단의 교회로 인정받고 있다. 규모나 역사, 인지도 등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다.

안중교회는 1947년 이 땅에 세워졌다. 당시 복음의 불모지였던 평택군의 포승면 오성면 청북면 현덕면 등 서부지역 복음화의 사명을 안고 지역 최초의 교회로 탄생했다. 당시 주소는 현덕면 화양리 산38의1번지. 지금의 안중교회가 있는 바로 그 자리다. 당시 인광리교회에서 시무하던 박기서 전도사와 성도들이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로 하고 작은 초가로 시작했다. 이런 점에서 안중교회의 역사를 전신인 인광리교회로 보아 1932년부터로 칠 수도 있다.

안중교회 설립 당시 소속 교단은 ‘하나님의교회’였다. 한데 이듬해 한국 선교에 나선 미국 나사렛교단이 역시 같은 오순절 계통인 하나님의교회와 연합해 한국의 나사렛교단을 만들었다. 안중교회는 내부 논의 끝에 나사렛교단에 들어 교단의 심장이자 모판 역할을 자임했다. 박 전도사는 한국 나사렛교단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64년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와

올해로 64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안중교회. 그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운 기록들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지역복음화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초창기부터 활발히 교회를 개척해 무려 12개를 세운 성과가 대단했다. 신포교회 내기리교회 홍원교회 오성교회 수촌교회 길음교회 은성교회 황금교회 열린교회 아름다운양지교회 쉴만한물가교회에 이어 올해 초 마중물교회를 세웠다. 해외에서도 2007년 인도에 파테풀교회를 세운 데 이어 지난 4월 필리핀에 교회를 개척했다.

안중교회는 70년대 초반 교단과 불화를 빚다 잠깐 교단을 탈퇴하는 등의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교단과 지역의 원조 교회이자 중심 교회로서의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해왔다.

이러한 안중교회의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 교회당 3층의 자료실이다. ‘안중교회연혁사’ ‘안중교회30년연혁’에다 사무총회록, 제직회의록, 주보와 각종 장부 등 자료가 보관돼 있다. 몇 개의 책꽂이를 빽빽하게 메운 방대한 자료에 경외감이 들었다.

9대 담임으로 2007년부터 시무하고 있는 윤문기 목사는 “이충헌 초대 장로와 선대 목회자들의 노력으로 교회의 모든 자료가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면서 “국내서 이런 교회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7대 이호정 목사와 교회사학자 정병식 박사는 2006년 한 해 동안 이곳에 틀어박혀 1000쪽에 가까운 ‘안중교회60년사’를 만들었다.

뿐만이 아니다. 교회당 곳곳에는 안중교회의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보물’들이 곳곳에 있다. 처음 지어진 초가 교회서부터 4차례 재건축된 옛날 교회당 사진이 대표적이다. 60여년 전의 교회당 종도 지하에 보관돼 있다.

글로컬 교회를 향해

교회당 여기저기를 훑어보고 나서 윤 목사의 집무실인 목양실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 사진으로 채워진 한쪽 벽면이 이색적이었다. 올해 등록한 새신자들이었다. 윤 목사는 “새신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고, 한 명 한 명 얼굴을 보면서 기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안중교회는 전도 못지않게 새신자들의 정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새신자는 의무적으로 5주 동안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교육을 받게 한다. 윤 목사는 직접 이 교육을 챙긴다. “예수 생명을 얻어야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윤 목사의 소신 때문이다.

안중교회에 올해 등록한 새신자는 130여명. 연말까지 200명은 거뜬히 채워진다는 게 윤 목사의 장담이다. 인근 평택공단으로 유입되는 인구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주민과의 교류와 소통에 노력하는 안중교회의 모습은 초기부터 일관되게 이어져왔다. ‘어머니 기도회’도 그 일환이다. 매년 봄과 가을에 지역의 어머니들을 대거 초청해 함께 교제하며 기도한다. 가정생활과 자녀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강사를 초청하고, 여선교회 회원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한다. 교회는 매년 2∼3차례 아버지학교도 열며,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각종 문화행사도 마련한다.

교회는 필리핀 키르기스스탄 라오스 라이베리아 카메룬 등의 한국인 선교사를 후원하면서 인도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의 나사렛 교회학교를 돕고 있기도 하다. 필리핀에 있는 아시아태평양 나사렛신학대학원을 통한 선교 네트워크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역과 세계를 섬기는 글로컬 교회(global+local church)를 지향한다”는 윤 목사의 말이 충분히 수긍됐다.

64년 교회사 가장 큰 족적

故 이충헌 장로 업적 기려 추모비

기록·자료 정리… 교인 단합 초석


안중교회가 지내온 64년 역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은? 답은 안중교회에 들어서기만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정문 오른쪽에 아담하게 서 있는 검은 대리석의 ‘고 이충헌 장로 추모비’다.

이 장로가 안중교회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1915년생인 그는 안중교회 설립 멤버로 들어 84년 하늘나라로 떠날 때까지 초지일관 교회의 기둥 역할을 했다. 교회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다 73년엔 안중교회 첫 장로가 됐다. 특히 교회의 모든 일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자료를 꼼꼼히 정리한 공로는 단연 높게 인정받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안중교회의 격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평신도로서 교단의 신학교 고문과 교회학교 분과위원장을 맡는가 하면 안중지역제직연합회를 조직해 지역 기독교인 단합의 초석을 놓기도 했다. 안중교회까지 거리가 멀어 저녁 예배에 참여하기 어려운 홍원리 거주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삼기도 했다.

한학과 한의학에 뛰어난 경지를 이룬 그는 신학까지 공부해 교역자가 빌 때는 강단에 서기도 했다. 슬하의 3남 3녀를 한결같이 하나님의 일꾼들로 키워 신앙의 명가를 이루기도 했다. 장남 계승(장로·법학자), 장녀 계인(권사), 차녀 계숙(사모), 차남 계석(장로·전 경기도의회의장), 계준(장로·전 서울대 교수), 삼녀(권사) 등이다.

차남인 이계석 장로는 아버지의 한약방과 함께 안중교회의 기둥 역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장로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하였으며, 담임교역자에게는 언제나 복종하였고, 교회의 대소사에는 청지기로서 신실하였으며, 교우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웠다”고 회고했다. ‘안중교회 60년사’에는 “이충헌 장로는 효(孝) 제(悌) 충(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기독교 신앙을 통해 실천한 한학자요, 한의사요, 성결한 성도(聖徒)였다”고 기록돼 있다.

평택=글 정수익 선임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