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단체장에 듣는다-③ 이희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복수노조 순항… 노사문화 새 이정표될 것”
입력 2011-09-28 21:47
이희범(62)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최근 서울 남대문로 STX에너지·중공업 집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고령화 시대를 맞아 정년연장이 필요하다”며 “다만 임금 피크제나 평가시스템 개선 등에 대한 논의가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복수노조가 잘 안착되면 올해는 노사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긋는 해가 될 것”이라며 “투쟁과 대립을 주도했던 강성노조에 대한 반발로 합리적 성향을 가진 노조,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조가 설립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난사람=신종수 산업부장
-바람직한 노사관계는.
“2000년대 노사분규의 85% 이상은 민주노총 산하 노조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2009년 이후 60여개 노조가 민주노총의 이념적 투쟁에 반대하면서 탈퇴했다. 복수노조 시행 후 신설된 430개 노조 가운데 86.3%는 상급 단체를 선택하지 않는 등 이념적 정치 투쟁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투쟁과 대립을 주도했던 강성노조에 대한 반발로 합리적 성향을 가진 노조,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조가 설립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노조는 조합원을 위한 정책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사용자는 전체 노조를 합리적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정부는 노사관계에서 공정한 룰이 형성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일부 대기업이 무분규에 집착해 노조의 과도한 요구도 일단 들어주고 본다는 지적이 있는데.
“대기업 노조가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다. 노조를 만들고 해고를 어렵게 하고 과도한 임금인상과 복지확충 등을 요구하는 게 근로자를 보호하는 방법이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 역시 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과보호와 경직된 법제도 때문에 발생한다. 지난달 당정이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발표했는데 세부적인 내용을 법으로 정해서 강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현재의 일자리마저 감소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정규직은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등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기업은 근로자 간 불합리한 차별과 위화감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생발전은 노사관계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복수노조 제도가 안착됐다고 보나.
“1997년 여야 합의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복수노조 제도가 통과됐다. 13년간 유예기간을 거쳐 지난해 7월 타임오프제(근로시간 면제제도), 올해 7월 복수노조제가 시행됐다. 복수노조제가 시행된 지 석 달 됐는데 비교적 잘 안착되고 있다고 본다. 제도 시행 이후 현재까지 430개의 노조가 새로 설립됐다. 이 중 80% 이상이 기존 노조에서 탈퇴한 사람들이다. 이를 두고 ‘어용노조’ 운운하는 것은 기득권 유지에 집착하는 기존 노조의 아집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일부 사업장에서 갈등을 빚는 곳도 있지만 제도 시행 초기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초기 혼란을 현명하게 극복하면 노사관계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정년연장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년연장이 필요하다. 단 그와 함께 수반돼야 하는 임금 피크제나 평가시스템 개선 등에 대한 논의가 없어 아쉽다. 공직생활 할 때 주변에서 ‘은퇴하면 뭐 할거냐’고 물으면 ‘아내가 학원을 하는데 운전기사 하겠다’고 했다. 임금은 생산성과 맞물리는 만큼 생산성이 떨어지면 임금을 적게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임금은 떨어져도 더 험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세도 필요하다. 정년연장이 도입되려면 임금체계 개선 등 노동시장 전반의 유연화가 선행돼야 한다.”
-복지와 포퓰리즘 간 균형을 어떻게 찾을 수 있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적정한 수준을 지켜야 한다. 목장에서 젖소 10마리 키울 때 우유가 10통 나왔다고 해서 100마리 기르면 100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젖소가 먹을 풀이 남아나질 않아 결국 우유는 한 통도 못 건진다. 사회가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는 것은 복지이고 그걸 넘어서면 포퓰리즘이다. 그 선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토요일 휴무제가 올해 7월부터 20인 미만 기업까지 확대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토·일요일과 공휴일이 겹치면 다음 날 놀자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이제 막 토요휴무제를 시행하고 있는 업체도 있는데 대체공휴제를 도입하자는 건 속도가 맞지 않는 것이다.”
-경총의 역점 사업 중 하나가 해외자원 개발인데.
“현재 해외자원·에너지 개발은 거대 다국적 기업과 주요국 정부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국력으로, 중국은 자본으로, 유럽은 자원부국들과의 네트워크로 자원 선점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자원 부서를 없앴다. 2003년까지 자원 개발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자원 개발은 장기간 막대한 투자금이 소요되고 위험도 크기 때문에 개별 기업이 단독으로 추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민관합동 해외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강화해야 한다. 또 정상외교를 통해 자원부국들과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자원 개발 성공 확률은 5%에 불과하다. 실패했을 때 용서하는 분위기도 조성돼야 한다. ‘선의로 했는데 파보니까 안 나오더라’ 이건 인간과 기술의 한계다. 물론 브로커가 개입해 문제가 되는 사례가 있지만 극히 일부다.”
-경총 회장으로서 앞으로 역점을 둘 부분은.
“지난해 노사분규는 2009년 121건에서 86건으로 줄었고 근로손실일수도 98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기업과 근로자들이 노사 상생을 위해 힘써 온 덕분인데 그 과정에서 경총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정치논리로 노사문제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 개별 기업 노사문제는 당사자 간 자율합의 원칙을 준수할 때 해결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정착되도록 힘쓰겠다. 또 경총 하면 노사문제만 전담하는 줄 알지만 최근 들어선 인적자원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고졸자·장애인·은퇴자 취업 확대, 청년실업 해소,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생각이다.”
이희범 회장은
이희범 회장은 관·학·산업계를 두루 거쳤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1971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72년 제12회 행정고시에서 공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수석 합격했다. 상공부, 통상산업부, 산업자원부에서 에너지와 무역 부문을 주로 담당했다. 이회장은 2002년 2월 산자부 차관을 끝으로 잠시 관가를 떠났다가 2003년 12월 산자부 장관으로 다시 발탁됐다. 2006년 2월 임기를 마치고 한국무역협회장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현재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STX에너지·중공업 총괄회장, 해비치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이 회장은 현장을 중시하는 경영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는 인터뷰에서 “고위공직자나 경영진이 현장을 가보지 않아 실상을 제대로 모르면서 보고만 받아서는 절대 해법을 찾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87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MBA)을 수석 졸업하고 2003년 경희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산업대 총장(2003년), 한미경제협의회 회장(2006년), 2013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유치위원장(2008)을 지내는 등 대외 활동도 활발하게 해왔다. 28일 조지워싱턴대 한국총동창회장으로 선출됐다. 저서로는 유럽통합론(97년)이 있다.
정리=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