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고향] (2) 강변교회 원로 김명혁 목사
입력 2011-09-28 21:12
도쿄→안주→평양→대구→서울… 그래도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
내가 태어난 곳은 일본 도쿄이다. 일본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시던 아버지와 의학을 공부하시던 어머니가 그곳에서 만나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 교회와의 교류 협력에 앞장서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호적 고향은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 558번지이다. 아버지의 호적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안주에 가서 몇 달씩 지낸 일이 있었다.
캄캄한 수요일 밤 할머니와 온 가족이 등불을 켜 들고 논밭 길을 걸어 멀리 있던 예배 처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김정숙 권사)는 한평생 기도와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니고 시집의 온 가족을 모두 예수님께 인도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평생토록 했다. 결국 남편을 회개시켰고 세 아들을 모두 예수 믿게 했다. 남편은 영수가 되었다. 맏아들인 나의 아버지는 목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집사가 되었고 셋째 아들은 장로와 목사가 되었다.
할머니는 주일에는 농사일을 절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이 모두 비웃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수 때가 되면 수확이 제일 많았다. 안주는 길선주, 임옥, 정진경 목사님과 같은 귀한 신앙의 스승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은 평북 신의주이다. 한경직 목사님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아버지 김관주 목사가 1938년부터 8∼9년 동안 신의주제2교회에서 한 목사님과 함께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한 살 때부터 한평생 한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한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한 분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신앙적 가르침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특히 어느 성탄절 연극에서 “알타반아, 알타반아”라고 하늘에서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가신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감옥 담장 밖에서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쳐 아버지를 부르곤 했다.
그때 나는 ‘뜸북뜸북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라는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다. 나는 그때부터 신앙은 고난을 무릅쓰면서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게 되었다.
초등부 시절을 보낸 곳은 평양이다. 아버지는 1946년 신의주제2교회를 사임하고 47년부터 평양의 서문밖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공산당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셨다. 또 아버지께서 평양 사동 탄광에 갇혀 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가 아버지를 회유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강 목사와 손잡으려면 왜 이곳에 와서 고생하겠느냐”고 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평양 서문밖교회 출신인 이승만 목사님은 96년 7월 9일자로 미국에서 나에게 보낸 팩스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옛날 김관주 목사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나의 기억에 새롭습니다. 공산 치하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말씀을 전하시던 장엄한 모습의 기억이 오늘까지도 깊이 남았지요.” 평양은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던 곳이었다. 44년 4월 주기철 목사님과 최봉석 목사님께서 순교의 피를 흘리셨다. 나는 47년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었지만 일요일 학교 등교를 거부하고 주일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가서 드렸기 때문에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섰고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신앙적 감화와 함께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로부터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서 몸에 지녔기 때문이었다.
평양은 참으로 오늘의 나를 만든 신앙의 고향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다. 만 11살 때였다.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를 만나서 인사를 나눈 다음 여기서는 주일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 없이는 못살겠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하셨다.
결국 나는 철없이 아니 모험적으로 48년 8월 영적인 고향인 평양을 등지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남겨두고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다. 함께 오던 어른들은 인민군에게 모두 잡히고 나만 혼자서 산과 들과 강을 뛰어넘어서 미지의 땅 남한으로 달려왔다. 나는 지금도 안주가 그립고 신의주가 그립고 평양이 그립다.
오래전에 평양을 공식 방문했을 때 평양 거리가 보고 싶어서 고려호텔을 몰래 다섯 번이나 빠져 나와 평양 시내를 걸어다닌 일도 있었고 묘향산으로 가는 길에 안주 근처에 차를 세우고 안주를 멀리서 바라본 일도 있었으며 중국 단둥을 방문할 때마다 압록강 건너편의 신의주를 바라보며 그리워한 일도 있었다. 안주와 신의주와 평양이 나의 영적인 고향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사실 나의 고향은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기철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김화식 목사님 등과 함께 평양에서 순교하시고 천국으로 가신 나의 고향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며 아버지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글을 띄운 일이 있다.
나의 고향은 안주와 신의주와 평양으로 그친 것은 아니다. 내가 중학생 시절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을 몇 달에 한 번씩 부흥회 때마다 만나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 따라서 이 목사님과 함께했던 대구도 나의 그리운 고향이 되었다. 또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한국의 예레미야 김치선 목사님을 만나 신앙적인 지도를 받아 보다 분명한 목회자의 길로 달려갈 수 있게 되었던 서울 창동교회와 대창교회도 잊을 수 없다.
남산 기슭 중구 회현동 2가 45번지의 집, 종로구 충신동 221번지의 집도 모두 나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된 고향은 하늘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질 하늘의 본향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지나온 고향보다는 앞으로 도달하게 될 본향을 더 그리워하고 사모한다.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
◎ 김명혁 목사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나 평양, 대구, 서울 등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서울대 사학과,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아퀴나스신학교를 졸업했다. 서울 영안교회·강변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지금은 강변교회 원로목사이다. 강변교회 목회를 하면서 합동신학교 교수와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