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철희 (4) 혹독했던 유학생활… 시련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입력 2011-09-28 17:50
유학생활을 하던 버펄로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는 곳이다. 캐나다와 인접한 국경 도시라 겨울이 일찍 찾아온다.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2차대전 때 지은 아파트라 벽이 얇고,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매서웠다.
마룻바닥 틈새로 지하실의 차가운 공기가 올라왔다. 한겨울엔 카펫 없이 버텨낼 수 없을 정도였다. 얼핏 가게에 써 붙인 카펫 가격을 계산해 보니 한 달 생활비를 훨씬 넘었다. 갑자기 결정한 유학이라 경제적 준비가 충분치 않아 어려움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모텔 하시는 분을 알게 되어 침대 대신 식구 수대로 중고 매트리스를 얻어놓았다. 그처럼 많은 돈을 들여 카펫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는 집 근처에서 큰 쓰레기 봉지와 함께 둘둘 말려 있는 노란색 카펫을 발견했다. 카펫이 워낙 커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조각 카펫을 마룻바닥에 모자이크하듯 깔았다. 또 중고품 세일에서 3달러를 주고 수동식 청소기도 샀다. 자루가 없어 몸통으로만 밀고 다니는 고물이었지만 아내는 돈 벌었다고 자랑했다.
난방비도 엄청 들어갔다. 생각 끝에 우리는 방 한 칸에서 지냈다. 아이들은 아빠 엄마와 방을 함께 쓴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좋아했다. 우리는 한 방에 매트리스 네 개를 나란히 깔고 창문은 물론 벽까지 비닐을 덧붙였다. 비싼 의료보험료 때문에 병원 가기가 쉽지 않았다. 한데 마침 고교 선배 의사가 세 분이나 있어 우리 가족을 보살펴 주셨다. 그들은 우리를 만난 이후 뒤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해 지금은 모두 장로님이 됐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끝없이 다가왔다. 생활비가 거의 바닥이 날 즈음 내 가까운 친구중 하나가 한국에서 뉴욕에 왔다가 짬을 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원양어업회사를 경영하는 친구였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눈에 짐작한 친구는 버펄로를 떠나면서 자기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내놓았다. 실은 그때 우리 통장에는 보름치 생활비밖에는 없었다. 훗날 나는 그의 회사에 입사하여 결국 사장까지 됐다.
현관 앞에 이따금 몰래 장을 봐다 주는 마음 따뜻한 분도 있었다. 그가 내 선배이며 내과의사인 장한교 선생의 부인 유 권사님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으나 일부러 묻지 않았다. 그분에게도 하나님께서 남몰래 주시는 기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유 권사님은 우리가 떠나올 때 아내에게 검정색 가죽 장갑을 선물해 주었다. 아내는 그 장갑을 무려 25년이나 애지중지 끼고 다녔다. 다른 물건은 잘 잃어버리는 아내도 그 장갑만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았다.
25년 후 그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유 권사님에게 가죽 장갑을 보여드렸다. “이것, 권사님께서 주신 장갑이에요.” 그런데 권사님은 놀랍게도 똑같은 새 검정색 가죽 장갑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앞으로 또 25년, 유 권사님 사랑 기억하면서 잘 끼겠습니다.”
나는 공대를 나왔기 때문에 경영학 공부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내게 가난한 생활은 견디기 어려웠다. 참으로 광야와 같은 곳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의존했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체험을 많이 했다. 행복과 소유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그때 삶을 통해 배웠다.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하곤 한다. 버펄로에서의 신앙 훈련과 가난 훈련은 훗날 내가 선교사로서 받아야 할 훈련을 미리 받은 것 같았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