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종교개혁 알을 낳은 에라스무스 (上)
입력 2011-09-26 17:31
예수님이 바보?… 세상 진짜 바보에 대한 조롱이었다
“예수는 바보다.”
르네상스 시대에 종교권력이 아무리 부패하고 쇠퇴했다 할지라도, 아직도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시대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단칼에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그런 시대에 이런 신성모독적인 주장을 하다니? 이런 주장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하려면, 목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에라스무스(1466 또는 1469∼1536년)였다. 그는 풍자적이고 익살맞은 문체로 ‘우신예찬’을 써서 예수가 바보라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했다. 우신예찬에는 인간의 순수한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바보신, 즉 우신(Moria)이 등장한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의 입을 통해 당대 종교지도자와 권력자 그리고 지식인들을 재치 있게 풍자하고 조롱했다.
우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왜 바보인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아버지 하느님의 지혜를 타고 났음에도 자신에게 내려진 어리석음의 몫을 받아들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리석음의 몫을 받아들였다니? 이 말은 예수가 바보가 되었다는 뜻 아닌가? 왜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바보가 되었을까? 우신은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된 것이다. 그는 오로지 십자가의 광기를 통해 무지하고 무례한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자 했다.”
예수가 바보가 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어리석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고린도전서 1장 21절)하고자 했다. 우신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에도 바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양’은 우둔한 짐승을 뜻한다. 그것은 어리석고 머리가 둔한 사람들을 모욕할 때 쓰는 말이었는데,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우신이 말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은 이렇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된 예수 그리스도. 바보가 된 예수는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똑똑한 자보다 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부들과 같이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자들을 선택했다.
더 나아가 우신은 바보 예수가 한 십자가의 말씀은 미친 소리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말씀이 미친 소리라니? 십자가의 말씀은 세속적인 쾌락과 가치를 버리라고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은 삭개오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남들의 모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속임수도 감수하고, 친구와 적을 구별하지 않으며, 쾌락을 두려워하고 단식과 밤샘, 눈물, 노고, 굴욕을 싫도록 맛본다. 이런 고난의 길인 십자가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속세의 눈으로 볼 때는 가장 어리석은 미치광이거나, 아니면 바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길을 걷겠다고 하면서 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자들을 자처하는 교황, 추기경, 주교 등 고위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광인과 바보의 대척점에 서 있지만, 우신은 실제로는 그들이 가장 어리석은 현자들이라고 조롱한다. 그중 교황에 대한 이야기만 옮겨 보자.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교황이 만약 그리스도의 청빈과 노동, 그의 지혜와 수난 그리고 현세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태도를 닮고자 노력한다면, 그리고 ‘아버지’를 의미하는 교황이라는 칭호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극히 성스러운’ 자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면, 그들은 인간들 가운데 가장 불행하지 않았을까? 오늘날 교황들은 힘든 일은 거의 성 베드로와 사도 바울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즐거운 일만을 담당한다. 교황들은 전쟁을 주된 일로 여긴다. 이 늙어빠진 노인네들 중에는 전쟁을 하느라 청춘의 열정을 바치고, 돈을 쏟아 붓고, 피곤함을 무릅쓰고, 그 무엇 앞에서도 후퇴하지 않았기에 결국에는 법률, 종교, 평화 그리고 전 인류를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에라스무스는 우신의 입을 빌어 교황뿐만 아니라 똑똑한 체 하는 세상의 진짜 바보들에게 신랄한 조롱을 보냈다.
에라스무스는 1506년에서 1509년까지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교회 권력의 엄청난 광기와 우둔한 통치, 고위성직자와 귀족들의 허영과 허상을 가까이서 목격했다. 루터가 로마를 여행하고 나서 분노를 느꼈다면, 에라스무스는 같은 현상을 보고 가가대소하며 조롱했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의 구상을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가는 도중의 말 위에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절친 토머스 모어의 시골집에서 완성했다. 우신을 뜻하는 모리아는 토머스 모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우신 예찬은 당대 현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담았지만 전혀 진지하지 않다. 아마도 이 책을 쓰면서 에라스무스나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토머스 모어도 서로 낄낄대며 웃었을 것이다.
우신예찬을 읽은 사람들은 통쾌하면서도 유쾌해 했다. 루터도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신예찬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퍼져 나갔다. 교회는 우신예찬을 불쾌해 했다. 그러나 풍자와 익살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종교 개혁의 불씨는 제대로 찾아 내지 못했다.
루터가 1517년에 95개조 논박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 문에다 붙이고 종교 개혁의 불이 붙자, 구교측은 에라스무스를 이렇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고 루터가 부화시켰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