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서민정] ‘서촌’이라는 동네

입력 2011-09-25 17:40


최근 관객의 호평을 받으며 인기를 얻는 영화 한 편 있다.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이다. 전체 분량의 90%가 서울 북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재동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시작해 헌법재판소를 거쳐 정독도서관으로 향하는 언덕배기를 예스럽게 비추고, 삼청동과 인사동 거리를 훑어 나간다. 영화 덕분인지 북촌을 찾는 발걸음이 더 늘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삼청동을 중심으로 북촌이 꽤나 알려진 상태지만 다시 부각되고 있는 듯하다.

입소문을 듣고 영화를 보러 간 나는, 엉뚱하게도 보는 내내 북촌이 아닌 ‘서촌’ 생각이 났다. 영화 보기 며칠 전 문화예술 명예교사로 참여하는 김원 건축가를 만나 서촌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나뉜 북촌과 서촌. 세종대왕이 궁 안이 아닌 궁 밖에서 태어났고 그곳이 서촌이라는 것, 화가 정선의 ‘인왕재색도’에 서촌이 담겨 있다는 것…. 북촌에 비해 덜 알려진 서촌에 대한 나의 역사지식은 이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김원 건축가를 통해 알게 된 서촌의 옛 모습은 삶이 곧 문화인, 그런 동네였다.

북촌이 조선시대 양반가 동네였다면, 서촌은 화원(畵員)·서당선생·역관 등 중인 동네였다. 오늘날로 치자면 화가, 교사, 통역사와 같은 직업군이 모여 살았던 것이다. 각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이들은 궁에 드나들며 일하였던 터라 예술에 대한 상당 수준의 안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삶 속에 녹여내어 서촌 안에서 여러 모임을 꾸려 활발히 예술 활동을 했고, 그 시대 백성의 삶과 계급사회에 대한 애환을 시와 그림으로 풀어냈다.

그들은 시문집을 내고 백일장도 열었다. 백일장에는 수백명의 중인들로 성황을 이룬 데다 평민과 노비, 여성도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생활문화공동체를 형성하여 그 속에서 경제적·문화적 삶을 영위했다. 10∼20대를 홍대 거리에서 지내며 문화적 취향과 감수성을 갖게 된 나 같은 이들을 일컫는 ‘홍대 키즈(kids)’처럼 서촌에도 소위 ‘서촌 키즈’가 동네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동네에서 예술을 즐기고, 그 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나중에 커서 어떤 직업을 갖든 간에 그는 예술과 동떨어진 삶을 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문화예술이 중요함을 역설하는 모든 이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인데, 이미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았던 역사적 경험을 서촌에서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팍팍한 직장 일과에서 벗어나 예술적 감성을 충전하고픈 마음에 긴 시간을 들여 삼청동이나 홍대를 찾아가 문화를 소비하는 것보다 그런 재미있는 꺼리들을 어떻게 내 일상과 내가 사는 동네 안에서 만들 수 있을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민정 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국제홍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