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진중권·편집자 선완규, 책 10권 내며 ‘18년 호흡’… “우린 통하는 사이”

입력 2011-09-23 17:40


‘미학 오디세이 1∼3’ ‘교수대 위의 까치’

‘레퀴엠’ ‘미디어아트-예술의 최전선’

‘컴퓨터 예술의 탄생’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고전예술 편’

‘모더니즘 편’.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미학자 진중권(48) 성공회대 겸임교수와 편집 파트너인 선완규(45) 휴머니스트 편집주간.

진 교수가 쓰고 선 주간이 편집한 ‘미학 오디세이’ 첫 권이 나온 건 1994년 1월.

마지막 ‘서양미술사-모더니즘 편’은 17년 6개월 뒤인 2011년 7월 태어났다.

그렇게 10권의 책이 20년 가까운 둘의 인연 위로 쌓였다. 지난 8일 18년 세월의 흔적을 앞에 두고 수다가 시작됐다.

◇쌓인 책만큼 쌓인 ‘애증’

두 사람은 1993년 석사과정 대학원생과 입사 1년차 편집자로 처음 만났다. 둘 다 젊고, 초짜였고, 무명씨였던 시절. 유학 준비 중이던 진씨는 비용을 마련해보려고 지금은 스테디셀러가 된 ‘미학 오디세이’ 1권을 쓰고 있었다. 원고 수발이 자칭 ‘어리바리 초보 편집자’ 선 주간 몫으로 떨어졌다.

저자와 편집자. 둘 사이가 늘 매끄러울 수는 없었다. 유학생은 유명논객을 거쳐 교수가 되고 초짜 편집자가 주간이 됐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신경전은 있다. 제목을 두고, 디자인과 도판을 놓고, 때로 캡션 하나 다는 문제에 논쟁은 이어졌다. 무엇보다 빚 독촉보다 무섭다는 원고 독촉을 해대는 편집자 전화는 18년 받아도 반갑지 않다.

“전화기가 울리는 데 딱 보니까, 선 주간이야. 원고 달라는 얘기잖아요.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짜증스럽기도 하고. 전화 받아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만 얘기해. 당신 안녕하고 나도 안녕하고 날씨 좋잖아. 본론으로 들어가’ 그래요.”(진 교수)

“선생님 말투가 그래서 무섭다는 사람이 많아요. 처음에는 내가 잘못한 게 많나 보다 걱정하기도 하고, 다시는 원고 달라고 안 한다 결심도 하고(웃음)” 그게 말투라는 건 세월이 알려줬다.

지금은 목소리만 듣고 일의 진척을 짐작하는 경지에 올랐다.

“영업부에서 ‘진 선생님 책 6월로 잡나요?’ 그러면 내가 ‘일 한두 번 해봐? 8월!’ 그래요. 제 예상이 딱 맞아요.”(선 주간)

“내가 절반쯤 썼다고 하면 이제 시작했다는 얘기구나, 금방 알아들어요(웃음)”(진 교수)

가끔은 다른 출판사에서 퇴짜 맞은 책이 선 주간 손에 도착하기도 한다.

“원고 ‘빠꾸’ 맞았다.”(진)

“보내보세요.”(선)

“(하루 뒤) 우리가 낼 게요.”(선)

종종 전화 두 통으로 출간이 결정되기도 한다. 역시 세월의 힘이다.

◇내가 본 ‘저자 진중권’ & ‘편집자 선완규’

선 주간은 ‘미학 오디세이’ 1권을 10번 넘게 읽었다. 초교, 재교, 삼교까지 교정 보고 책이 나오면 또 읽고, 개정판 낼 때 그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했다. 진중권이라는 작가의 책을 읽고 또 읽고 책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 읽는 사람. 아이디어가 기획이 되고 원고가 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 그래서 ‘저자 진중권’을 제법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이도 이 사람, ‘에디터 선완규’다.

그가 자신 있게 말하는 진 교수의 매력은 ‘구체화 능력’이다.

“추상적인 얘기를 가장 구체적으로 말하는 탁월한 재능이 있어요. 보통 이론가들은 그런 감각이 없잖아요. 아주 적절한 예를 쓰기도 해요. 이를테면 어떤 작품에서 본 어떤 상, 어떤 장면, 어떤 말을 툭툭 던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그게 상황에 딱 들어맞는 거죠.”

잘 알면 쉽게 쓴다는 진리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사람은 아는 걸 쓴다, 헷갈리게 안한다, 그런 걸 알게 됐어요. 어떤 선생님 글은 애매하거든요. 자기도 헷갈리는 거 쓴 거죠.”

진 교수가 본 ‘에디터 선완규’는 ‘공부하는 편집자’였다. “내가 강연하고 있으면 쓸데없이 와서 앉아 있어요. 속으로 ‘근무시간이 아니잖아. 시간외수당이라도 받나’ 궁금했죠. 말로는 (저자) 꼬시러 왔다는데, 거의 연구자 수준으로 공부해요.”

편집자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 지식 매개자가 되기 위해서다.

“저는 여러 분야를 보니까 한 분야를 깊게 연구하는 학자들이 놓치는 다른 동네 얘기를 전해줄 수 있잖아요. 누가 이런 얘기를 하던데 한번 읽어보시죠, 그런 거. 일종의 지식 거간이나 중계 같은.”(선)

“실제 도움이 많이 돼요. 저는 뭐든 혼자 하는 스타일인데 눈을 돌리게 해주니까. 그래서 선 주간과 책을 낼 때는 결합도가 높아져요.”(진)

한국 출판시장에 20년 넘은 베테랑 편집자는 드물다. 출판사 규모가 영세하다 보니 10년 넘은 경력자는 관리직으로, 사장으로 독립한다. 진 교수의 명쾌한 비유를 빌리자면, “다들 감독(사장) 지망생이니 촬영감독(편집자)의 전문성이 있을 리 없는” 상황이다. 편집이 교정을 넘어서는 기획이자 ‘저자 매니지먼트’라고 믿는 선 주간은 그런 현실이 안타깝다.

“한 저자하고 오래 일하다 보면 이 저자 사유의 흔적을 죽∼ 목록으로 남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목록이 저자가 가진 사유의 폭을 보여주는 거죠. 진 선생님도 때로는 독자들과 함께 생각하는 쉬운 책을, 때로는 깊은 이야기를 펼쳐놓는 어려운 책을 내서 함께 가야 해요. 그래야 시너지 효과가 생기거든요.” 진 교수도 “500명만 읽는 책을 내는 것”이 계획이라니 ‘진-선’ 커플의 소망은 꼭 이뤄질 모양이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