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열풍이 일본선교의 빗장을 열다
입력 2011-09-23 15:58
일본 내 한류열풍은 여전했다. 연예인들에 대한 인기도 시들 줄 몰랐고, 막걸리, 김치를 비롯한 한국 음식과 한국어 배우기도 한창이었다. 한류 열풍은 일본 선교의 지형도까지 바꿔놓고 있었다.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의 고후(甲府)시. 야마나시현의 현도(縣都)인 이곳은 인구 20여만명의 소도시다. 고후교회(홍창희 목사)는 고후시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한인 교회다. 올해로 개척 15년째인 이 교회 교인은 모두 80여명. 2002년엔 지금의 건물도 구입해 번듯한 교회가 됐다.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환경을 감안했을 때 고후교회는 ‘기적’ 외에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 홍창희(47) 목사는 “한국 목사가 일본에서 건물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며 “아무것도 없었다. 100% 하나님이 하신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매개 역할은 ‘한류 열풍’이 톡톡히 감당했다. 1999년이다. 한류 열풍이 일본으로 불어닥치기 직전이었다. 홍 목사는 아픈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로 갔다. 이렇게 몇 번 만나다보니 그 의사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데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매주 토요일 고후교회의 한글교실은 이렇게 시작됐다. 두어 해를 넘기면서 한류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자 한글 수강생도 20여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인 강사와 일본인 수강생들 사이에도 꾀 깊은 신뢰관계가 쌓였다. 경매로 나온 건물 얘기도 나오게 됐고, 그 의사는 선뜻 5억 원이 넘는 돈을 홍 목사에게 빌려줬다. 2002년 7월, 지금의 고후교회 건물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복음 전도의 문도 한류열풍을 타고 활짝 열렸다. 1년에 2~3차례 여는 김치교실에는 평균 50~60명의 일본인들이 참여한다. 불교 승려의 부인들까지 올 정도다. 이들은 김치가 절여지는 동안 한국어 찬양도 배우고, 예배도 드리면서 복음을 나눈다. 사역의 특성상 김치교실은 김부희(46) 사모의 몫이다. 본격적인 김치교실은 이 지역에 김치가 출하되는 다음달에 열릴 예정이다. 1년에 한번 경로잔치도 연다. 이때면 김 사모와 교인들은 한복을 입고 서툰 부채춤을 선보인다. 김 사모는 “학교 다닐 때도 부채춤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데 여기 와서 인터넷으로 배웠다”며 “주민들의 기대가 워낙 커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올 초부터 마을 반장(조장)으로 일하고 있다. 10여 가구를 대상으로 시에서 발간하는 회람을 돌리고 회비를 받아내는 게 주된 역할이지만 그들에게 말을 걸고, 관계를 맺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홍 목사는 야마나시현 국제교류협회와 공립 간호전문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맹활약하고 있다.
좋은 관계는 풍성한 전도의 결실로 맺혔다. 한 해 평균 12명의 일본인이 한인 교회인 고후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개척 후 지금까지 1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2007년엔 종교 단체로는 드물게 야마나시현의 종교법인으로 공식 등록돼 보호를 받고 있다.
홍 목사는 1991년 유학생으로 도쿄에 왔다가 소명을 받고 일본 선교에 헌신했다. 그동안 신문·음식 배달, 트럭 운전 등 힘든 아르바이트는 안해본 게 없을 정도다. 가난과 함께 교회 분열을 세 차례나 겪으면서 ‘난 목회 체질이 아니다’며 다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인고의 세월은 그에게 오히려 약이 됐다. 신뢰와 인내만이 굳게 닫힌 일본 선교의 빗장을 열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한류열풍은 ‘초고속’ 일본 선교를 가능케 했다.
“일본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강도(强度)가 한류열풍 이전과 이후 확연히 다릅니다. 한류열풍은 하나님께서 일본선교를 위해 보내주신 첫 번째이자 마지막 찬스라고 생각합니다.”
고후=글·사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