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에필로그] 한국교회 첫 선교지의 추억 (2)

입력 2011-09-23 17:33


‘한국교회 선교100주년’ 첫 선교지 중국 산둥성. 그중에서도 원덩(文登) 이야기를 지난주에 이어 계속하겠습니다. 어제 날짜(23일) 국민일보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지역은 1912년 박태로·김찬성 선교사의 사역지였습니다. 선교 100주년 취재팀이 두 선교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찾지 못했으나 당시 영국 형제교회가 세운 교회터를 발견했습니다. 또 그 무렵의 건축물로 추정되는 건물 벽에 십자가를 떼 낸 흔적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2005년 그 원덩의 조선족 ‘아파트교회’와 교회 부설 ‘폐(廢)인민극장’ 자활터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처럼 활기가 넘쳤습니다. 폐극장 공터를 활용해 농사를 짓고, 가축 사육도 했습니다. 신분을 감추어야 할 탈북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습니다.

한데 아쉬운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 가까운 곳에 한인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 측이 예배를 위해 찾는 조선족마다 아파트교회로 보내는 겁니다. “시정부의 인가가 난 교회이기 때문에 조선족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한인교회의 어려움이야 이해 가지만 사마리아인 내쫓듯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때문에 아파트교회는 차고 넘쳤습니다. 감사할 일이었으나 한국인 선교사의 부담은 늘어만 갔습니다. 6·25전쟁 직후 우리 상황처럼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이 많아서였습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킨 많은 조선족 분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원덩의 교회를 지키고 계십니다. 한국인 선교사는 여러 사정으로 그곳을 떠나야 했는데도 말입니다.

또 그때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된 이들이 ‘기회의 땅’ 한국에 오셔서도 여전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십니다. 지난 4일 서울 중국동포교회 장로 임직식에서 임직 받으신 조선족 여성 장로 세 분 이야기(본보 9월 6일자 27면 보도)가 바로 이와 같은 분들입니다.

전정희 종교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