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원전 사고와 한국의 정전사태는 말한다”… ‘전기 플러그를 뽑으라’ 권하는 후지무라 야스유키 박사
입력 2011-09-22 17:37
21세기는 석유문명이 아니라 전기문명인 모양이다. 전기가 잠깐 끊어지니 모든 게 ‘정지’였다. 반도체 공장이니 국가 기간시설이니 언급할 필요도 없다. 냉장고, 세탁기부터 냉난방과 가습, 제습, 조명, 환기, 청소, 조리, 설거지, 배변까지 전기 없이 되는 일이 없었다. 정전은 우리네 삶의 플러그를 깔끔하게 뽑아버렸다.
지난 7월 한국어판 ‘플러그를 뽑으면 지구가 아름답다’를 낸 일본 발명가 후지무라 야스유키 박사가 한국에 왔다. 후지무라 박사는 전기 에너지의 비효율성을 주장하며 10여 년간 전기를 쓰지 않는 비전력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비전력 기기 발명가. 전기 없는 삶을 주장해온 그의 목소리에, 전기의 위력에 놀란 한국 독자의 관심이 새삼스레 쏟아졌다. 강연을 위해 서울 영등포동 하자센터를 방문한 그를 20일 만났다.
-독자에게 ‘플러그를 뽑으라’고 권했다. 전기를 쓰지 말자는 말인가.
“전기를 없애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전기에 의존하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말한 거다. 일본 가정용 에너지 중 전기 비율은 15년 전 25%에서 최근 35%까지 늘었다. ‘3·11 사고’(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에는 일본에서 ‘올(all) 전화(電化) 주택’이 대유행이었다. 가스와 석유를 쓰던 조리, 난방, 온수를 전부 전기로 충당하는 주택인데, 신규 주택의 80%가 올전화주택이었다. 일본 집을 다 전기화하면 원전 68기 분량의 전력이 더 소모된다. (일본 정치인들은) 진짜 그걸 다 원전으로 충당하려 계획했다. 그런 와중에 3·11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전기는 친환경 이미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화석연료보다 전기가 더 나쁜 건가.
“전기가 친환경이라는 건 오해다. 전기차는 친환경차가 아니다. 전기 자동차는 매연이 나지 않으니까 깨끗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이 위험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화력발전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태워야 한다. 당장 내 눈앞에 매연이 안 보인다고 친환경이 아니다. 전기는 생산, 송전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가 유실된다. 비효율적인 에너지다. 일본에 보급된 자동차 8000만대를 다 전기차로 바꾸면 원전 207기의 전력이 더 필요하다. 물론 석유보다 전기가 더 나쁘다는 건 아니다. 둘 다 에너지이고 결국 문제는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는 것이다.”
-대체 에너지가 개발되고 있지 않나.
“일본은 세계 최고의 지열(地熱) 대국이지만 다 모아도 고작 원전 20기 분량이다. 현재 일본이 쓰는 에너지(원전 850기)를 충당하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태양 에너지 얘기도 많이 하는데, 원전 850기분을 생산하려면 일본 국토의 27%를 태양열 집열판으로 깔아야 한다. 에너지 소비는 계속 늘고 있는데 그걸 다 자연 에너지로 대체하는 건 불가능하다. 에너지에 의존하는 삶을 바꿔야 한다. 소비를 줄이고 꼭 필요한 걸 자연 에너지로 대체해야 현실성 있다.”
-원전 사고 이후 전기를 바라보는 일본 시민들의 시선이 바뀌었나.
“그동안 일본에서 원전은 일종의 금기였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비판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 이제야 사람들이 원전의 위험성을 깨닫게 됐다. 사회 자체가 전기를 안 쓰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3·11 사고가 전기에 의존하는 게 행복한 삶인지 의문을 던졌다.”
-절묘한 시점에 한국에 왔다. 최근 한국의 정전대란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인간 삶이 얼마나 전기에 의존해 있는지 (정전 사고를 통해) 깨닫게 되길 바란다. 만약 (정전대란이) 전기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거나, 그래서 원전이 필요하다는 식의 논의로 귀결된다면 정말 실망스러울 것 같다. 한국 정전과 일본 원전 사고는 에너지 의존이 빚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연결돼있다. 이웃 나라에서 엄청난 일(후쿠시마 원전 사고)이 벌어졌다. 한국이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책에는 에너지 정책 얘기는 없다. 작은 발명품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작은 것이 큰일을 만들어낸다. 지금이 그런 세상이다. 세상은 놀라울 만큼 연결돼 있어서 일본 어느 구석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이 세상에 금방 알려지고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정치가는 여론이 바뀌어야 움직이지 않나. 작은 일이 생각을 바꾸고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
-전기를 쓰지 않는 비전력 제품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발명에 매달리게 된 계기는.
“천식을 앓는 아들을 위해 공기청정기를 발명한 뒤 여기까지 오게 됐다. 올해 31세가 된 아들은 미국에서 반도체 공학을 공부하고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최근 내가 운영하고 있는 비전력 공방(가나가와현에 위치한 작업장으로, 비전력 발명품을 시험 제작한다)에 합류했다. 지금은 수련생 4명과 함께 공방 일을 거들고 있다.”
플러그를 뽑으면 지구가 아름답다 / 북센스
비전력 생활의 이념을 설파한책이라기보다 비전력 생활 실용서에 가깝다.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처럼 저자 후지무라 야스유키 박사가 발명해 이미 일본에서 상용화된 비전력 제품의 작동원리를 소개했다. 음식물 쓰레기 건조기, 조리기, 무공해 탈취기처럼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비전력 제품도 있다. 제조법까지 안내했는데, 그중 쓰레기 건조기는 한번 도전해볼만한 품목이다.
후지무라 박사 발명품 중 히트작은 몽골 유목민을 위해 만든 비전력 냉장고. 양 두 마리 가격의 냉장고 덕에 유목민들은 한여름에도 양고기를 2주 이상 저장할 수 있게 됐다. 나이지리아 어린이를 위한 태양열 식수 살균기도 큰 돈 들이지 않고 삶을 바꾼 성공작이었다.
‘전기보다 인간 노동이 낫다’는 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손빨래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고, 전기청소기보다 빗자루 쓰레받기를 사용한 청소가 더 쉽고 즐겁다고 말한다. 손빨래가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전기제품의 비효율을 지적한 부분은 인상적이다.
신발을 벗지 않는 서구식 카펫문화를 위해 개발된 전기청소기는 2m 전방의 먼지 5g을 청소기안 주머니로 이동시키기 위해 무려 200만W의 전력을 쓴다. 에너지 효율은 2000만분의 1. 발전소에서 가정에 오기까지 유실된 전력까지 따지면 효율이 5000만분의 1밖에 안 된다. 빗자루로 몇 번 쓱싹 쓸면 되는 일에 그 많은 전기를 써왔다니, 반성할 일이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