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상온] 남·북·러 가스관사업 실체 바로 봐야
입력 2011-09-22 17:42
혹시 ‘5·14 단전(斷電)’을 아시는지? 이젠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을 이 일은 1948년에 일어났다. 그해 5월 14일 낮 12시 북한은 남한으로 보내던 전기를 기습적으로 차단했다. 당시 남한 전력 수요의 70%를 공급하던 북한이 송전을 중단하자 남한은 당장 난리가 났다. 생산 활동이 전면 마비된 것은 물론 일반 가정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아 암흑천지가 됐다.
소련군정을 등에 업은 북한이 5·14 단전을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미군정이 송전 요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5월 10일 치러진 남한 단독 총선거였다. 그에 대한 일종의 보복.
바로 이와 유사한 ‘북한발 에너지 대란’이 또 발생할지도 모른다. 북한 땅을 경유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공급받는 가스관 사업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전될 것’(이명박 대통령 발언)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5·14단전’ 교훈 되새길 때
그러나 남·북·러 가스관이 연결되면 제2의 5·14 단전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중간에서 가스관 꼭지를 틀어쥐게 될 북한이 남한에 대한 보복이나 압박 등 정치·군사적 이유로 꼭지를 잠가버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는 계약 따위는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채 북한 내 한국 자산을 일방적으로 몰수해 버린 금강산 관광 사업의 예에서도 단적으로 입증된다.
그럼에도 가스관 사업을 옹호하는 측은 그 같은 우려를 기우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우선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은 적어도 연 1억 달러에 이를 가스관 통과료 등 경제적 이익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또 냉전시대 혈맹인 러시아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다. 결정적으로 남·북·러 가스관 연결은 한반도 긴장을 줄여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낙관적인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북한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경제적 손실을 감수한다. 정권 안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인민의 경제난은 북한 정권에 큰 문제가 아니다.
또 러시아는 북한에 냉전시대의 혈맹이 아니다. 북한은 중·러 줄타기 외교에서 이미 러시아를 소외시켰다. 오히려 러시아가 가스 공급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러시아는 2009년에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막아 유럽에 가스대란을 일으켰다. 가스관 경유국 우크라이나가 가스 공급을 늘려 달라고 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자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기 위해 안정된 가스 공급 약속을 어기고 가스 공급을 중단한 것.
게다가 가스관이 연결되면 남북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다. 가스관을 연결하면 남한 군함을 격침시키고, 연평도 민간인들에게 대포를 쏴대고, 금강산 관광객을 사살하고도 나 몰라라 하는 북한과 저절로 관계가 개선된다니 말이 되는가. 남북관계가 개선된 뒤에 가스관을 건설하는 게 순서다.
경제 아닌 정치적 사업
남·북·러가 가스관을 추진하는 이유는 일단 경제적 이득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안정적 가스 판매처를 얻어서, 남한은 가스도입 비용을 줄일 수 있어서, 북한은 통과료 수익을 얻을 수 있어서 좋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일 뿐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큰 것으로 봐야 한다.
솔직히 말해 러시아는 북한을 경유해 한국에 가스를 판매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되살리려 하고, 북한은 가스관을 대남 정치·군사적 지렛대로 이용하려 하고, 남한은 이를 집권세력의 ‘정치적 치적’으로 삼으려는 게 진정한 의도 아닌가. 어느 것 하나 바람직한 게 없는 정치적 목적으로 추진되는 남·북·러 가스관 사업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