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갑의 먹줄꼭지] 비인기종목과 달인
입력 2011-09-22 18:08
며칠 전 막을 내린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경기종목을 보면 100미터 달리기나 마라톤처럼 낯익은 것도 있지만, 해머던지기처럼 웬만큼 스포츠에 관심이 없으면 들어보지 못했을 종목도 많이 있다. 비인기 종목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더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펼쳐지는 올림픽에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종목도 있다. 하계 올림픽에는 2008년 대회 기준으로 26개 부문 36개 종목에 300여개의 경기가 있고, 동계 올림픽에는 2010년 대회 기준으로 7개 부문 15개 종목에 80여개의 경기가 있다.
한때 정식 경기종목이었다가 지금은 빠진 것이나 시범 경기종목을 더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이들은 대부분 비인기 종목이다. TV화면에 자주 비춰 주지도 않고, 광고가 몰리는 종목도 아니다. 이런 걸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론 저런 건 왜 하나 하는 궁금증도 든다. 하지만 100m 달리기만 있는 육상대회나, 피겨스케이팅이나 비치발리볼만 있는 올림픽은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다.
매번 그와 비슷한 궁금증으로 시작하지만, 곧 ‘와!’ 하게 되고, 그 ‘와!’가 ‘아!’로 바뀌면서 끝날 때쯤이면 감동과 존경의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이다. 여기에는 보수가 높거나 권력이 있거나 명성을 떨치는 직종은 아니지만, 수 년 혹은 수십 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면서 그 일에 있어서 달인(達人)의 경지에 이르게 된 사람이 등장한다. 다슬기 까기, 비닐포장하기, 신발속지 넣기, 지게 지기 등 생각지도 못했던 기술을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보여줄 때, 그 숙련(熟練)의 아름다움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그 기술 자체보다도 그 사람의 손끝에서, 몸짓에서 그리고 눈빛에서 볼 수 있는 뿌듯한 자부심 때문이지 싶다.
“보람 있는 삶은 어떤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해, 이 사람들은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요?” 하는 식으로 그저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과 입가에 퍼지는 밝은 웃음으로 답한다. 내놓고 그렇게 말은 안 하지만 “힘들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세상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동료들이 인정해 주는 일. 그런 일을 하면서 살면 보람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답하는 것 같다. 그들이 행복해 보이고, 부럽다. 나를 돌아보게 되고, 내가 하는 일, 또 그 일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달인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또 다른 측면은 이런 개인적인 감동과는 사뭇 파장이 다른 것이다. 매년 대학입시에서 나타나는 학과나 전공의 쏠림 현상에도 관계가 있고, 취업철이면 신문에 등장하는 청년구직란의 바닥에도 이것이 있고, 우리나라가 가진 유일한 천연자원(?)이라는 인적자원의 생산적 활용과도 이것을 연결지을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모두가 대학에 가겠다고 하고, 대학입시에서는 몇몇 인기학과로 지원이 몰리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지원자들이 그 전공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어서, 또 잘할 수 있는 일이어서 그리로 몰리는 걸까? 그들 중 몇이나 그런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해 봤을까? 그 분야에서 달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 교직과 공무원직에서 수십 대 일, 수백 대 일이 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건 우리 사회에 ‘달인 교사’ ‘달인 공무원’이 될 사람들이 많아서 일까?
이렇게 한쪽으로 쏠린 경쟁 속에서 낭비되는 것은 개개인에게 숨어 있는 ‘가능성’이고, 그 가능성을 놓으면서 잃게 되는 것은 그들이 나중에 어딘 가에서 가졌었을 수도 있을 성취감과 자부심이다. 달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보지도 않고 접어 버리는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나 적성을 존중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이렇게 크고 복잡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다양한 재주와 기술이 필요하고, 그 재주와 기술이 자기한테 맞는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때, 사회 전체적으로도 가치와 효율이 가장 커질 것이다.
물론 그런 전공들, 그런 직종에 사람이 왜 몰리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 기회구조의 문제를, 왜곡된 가치와 비효율적인 제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안다. 그들 나름대로는 그런 구조와 제도 안에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 테니 그들을 쉽게 나무랄 수도 없다. 문제는 그 현실성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너무 근시안적이라는 데 있다. ‘생활의 달인’을 보면서 처음에 느끼는 ‘와!’의 가벼운 호기심을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 가슴에 와 닿는 ‘아!’의 감동으로까지 이끌고 가는 것은 지금의 ‘와!’를 있게 한 긴 시간의 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내가 잘하는 일은 뭔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코앞의 손익만 따지는 현실논리와는 다른 시간적 지평을 가지고 찾아야 한다.
“보람 있는 삶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달인의 삶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라는 질문에는 “달인이 많은 사회” “많은 사람이 달인이 될 수 있는 사회”라는 대답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이 다양한 달인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고 시험해 볼 기회를 주는 사회, 또 한편으로는 한 분야의 일을 오래, 잘하는 달인이 대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가 그런 사회일 거다. 그래서 개개인의 전문성과 성취가 사회 전체의 효율성과 복지로 합쳐지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