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처녀 ‘킹콩을 들다’… 이은경·서선영씨, 역도 대회 출전기

입력 2011-09-22 18:09


긴장감이 커다란 체육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경기대에 홀로 선 선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양쪽에 커다란 바벨이 달린 바(bar)를 단단히 움켜쥔다. 다리 근육이 팽팽해지고 팔 근육은 미세하게 떨린다. 고개를 들고 하나 둘 호흡을 맞추자 커다란 바벨이 휙 머리 위로 올라간다. ‘삐익∼’ 부저가 길게 울리고 모니터에 ‘성공’ 두 글자가 번쩍거린다. 관중석에선 박수가 쏟아진다.

어라? 그런데 역기를 들고 우뚝 선 사람이 자그마한 아가씨네? 지난 4일 경남 고성 역도전용경기장에서 열린 ‘2011년 전국 역도 동호인 고성대회’의 한 장면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장미란 등 여성 역도 선수가 있다지만 아무래도 역도의 이미지는 남성적이다. 그런데 역도를 ‘취미’로 하는 여성들이 있단다. “도대체 왜?”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건강미인들의 역도 예찬론을 들어봤다.

2011년 9월 4일, 첫 대회 출전

동호인 역도대회에 여자 선수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대회 사상 여성이 참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취미로 역도를 하는 여성이라…, 체구가 장미란 선수와 비슷할까? 왜 하필이면 역도를? 등등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4일 오전 8시. 고성 읍내의 한 식당에서 만난 여성 동호인 선수들 모습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 두 사람 모두 ‘거구’와는 거리가 먼, 군살이 없고 날씬한 체격이다. 키가 작은 쪽은 이은경(28)씨, 큰 쪽이 서선영(29)씨. “생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네요” 하자 “저희를 처음 보면 다들 그렇게 말해요”하며 까르르 웃는다.

두 사람은 “배부르면 안 되는데”라면서도 아침부터 김치찌개에 들어 있는 큼직한 돼지고기를 잘도 먹는다. 일반적인 역도 경기는 체중에 따라 체급을 나눠 진행하지만 이날은 동호인 대회인 데다 여성 참가자가 2명뿐이라서 따로 체급을 나누지 않았다. 게다가 계체량을 끝낸 뒤라 식사량 조절에 여유가 있다. 잘 먹는 모습이 무척이나 복스럽다.

9시30분, 역도전용경기장 뒤쪽 대기장 겸 연습장. 두 여성 역사가 바벨을 들어올렸다 내려놓을 때마다 쇳덩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 딱딱한 역도 신발이 마룻바닥을 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다. 두 사람의 각오가 대단하다.

대회에 참가한 건장한 사내들과 코치들이 두 사람을 꽤나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 심판원은 “삐 소리가 나면 역기를 내려라. 알고 있겠지만 막상 경기대에 서면 긴장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면서 친절히 설명한다. 곧이어 다른 관계자가 다가와선 “절대 웃지 마라, 긴장이 풀어지면 다친다”고 신신당부한다.

역도 경기는 인상(한번의 동작으로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종목)부터 가벼운 무게를 드는 사람이 먼저 나선다. 은경씨와 선영씨가 남성 선수들보다 앞서 출전, 은경씨가 1차 시기 27㎏를 가볍게 성공한다. 두 번째로 나선 선영씨도 29㎏를 번쩍 들어올린다. 두 사람은 시기마다 2㎏씩 올렸고 3차 시기까지 모두 성공. 관중석에선 박수 갈채.

이제 용상(바벨을 가슴 위로 받쳐 들었다가 머리 위로 올리는 종목)이 남았다. 두 사람은 대기실로 오자마자 자세를 잡고 바벨을 들어올린다. 검은 운동복은 어느 새 흰 초크로 허옇게 물들었고 목 부분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코치가 나서서 체력 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무작정 들었다간 큰일 난다며 연습을 말린다. 잠깐의 휴식시간, 은경씨는 다른 선수들 응원에 열심이다. 선영씨는 거울을 꺼내 보고 휴대전화로 어디론가 문자를 보낸다. 여느 20대 아가씨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11시부터 시작된 용상. 은경씨는 거침이 없다. 35㎏로 시작해 3차 시기엔 41㎏을 들어올렸다. 인상 용상 최종 합계 72㎏. 선영씨는 뭔가 호흡이 안 맞는지 자꾸 실패한다. 1차 시기 38㎏ 실패, 2차 시기엔 무게를 41㎏로 올려 도전했는데 또 실패. 마지막 3차 시기 41㎏ 재도전에 나서자 장내에선 격려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몰아친다.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는 번쩍 들어올린다. 이번엔 성공. 최종합계는 74㎏. 두 사람의 첫 번째 도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은경씨는 “이번 대회에서 내가 들 수 있는 최고 무게까지 들어서 더 기분이 좋았다”며 웃었다. 반면 선영씨 얼굴에 아쉬움이 살짝 묻어난다. “용상 때 실수를 안 했어야 했는데….” 두 사람이 매우 멋있어 보인다. 짝짝짝!

2011년 3월 어느 날

은경씨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헬스장을 꾸준히 다녔다. 5년 정도 러닝머신 위를 뛰다보니 운동이 지루하고 재미없어졌단다. 선영씨는 올해 1월 난생 처음 체육관을 찾았다. 평생 숨쉬기와 걷기 운동으로만 살아오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운동을 해야겠다 싶었다. 두 사람의 운동 목적은 ‘다이어트’.

3월 다니던 체육관에 역도 수업이 생기면서 두 사람은 역도와 만났다. 코치가 꼬드겼다. 역도하면 살빠진다고.

1주일에 한 번씩 진행된 역도 수업을 통해 자세를 배웠고, 수업이 없는 날에는 배운 자세를 반복하며 몸에 익혔다. 처음엔 미약했다. 역도에서 바벨이 안 달린 빈 바의 무게는 20㎏, 여성용은 15㎏다. 두 사람은 빈 바를 겨우 드는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들 수 있는 중량이 서서히 늘었다.

새로운 종목을 배우는 데 고생담이 빠질 수 없다. 자세를 잘못 잡아서 바벨을 든 채로 무릎이 꺾이기도 했고, 머리가 바에 부딪히기도 했다. 주변의 선입견도 부담스러웠다. “여자가 역도를 한다고 하면 선입견을 갖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체육관에서도 두 사람이 바벨을 드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나저나 초기 목적이었던 다이어트는 성공했을까? 결론적으로 체중이 줄지는 않았다. 선영씨는 야식 탓으로 돌렸다. “그렇게 먹었는데도 몸무게가 그대로인 거 보면…, 만약에 안 먹었다면 빠졌겠죠?” 은경씨도 처음엔 역도 수업 뒤 너무 힘들어서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다고.

하지만 다이어트의 최종 목적이 날씬하면서도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이라면 두 사람의 다이어트는 실패한 게 아니다. 두 사람의 몸은 점점 더 건강하게 변했다. 체지방과 허리둘레는 줄고, 근육선이 살아났다. 뱃살이 탄탄해지면서 복근이 생겼다. “변하는 몸을 보니까 역도를 멈출 수가 없었어요.”(은경) “복근이 11자로 잡혔죠. 전체적인 탄력과 밸런스가 좋아졌고 볼륨감도 생겼고요.”(선영)

심리적, 정서적 안정감도 찾아왔다. 은경씨는 공무원이다. 그는 “사회생활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몰랐었다. 역도를 한 이후 역도 동작에 집중을 하게 됐고,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날아갔다”고 말했다. 생활은 즐거워졌고, 자신감도 생겼다. “내성적인 제가 남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 수 있게 됐어요.” 역도가 성격도 바꿔놨다. 게임업체에서 3D 게임 디자이너로 일하는 선영씨는 “예전엔 쉽게 피곤해졌었는데 역도한 뒤로 체력이 좋아지면서 덜 피곤하다. 집중력도 좋아졌고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역도, 한계가 없는 매력덩어리

국내 여자 역도 선수는 3월 기준으로 355명이다. 중학생 141명, 고등학생 127명. 대학과 일반이 각각 23명, 64명이다. 장미란 선수는 일반부로 분류된다. 전문 선수가 아닌 여성 동호인 숫자는 집계 불가(不可)인데, 아무리 많아도 세 자릿수는 안 될 것이다.

올림픽이 열리는 4년마다, 아시안게임을 포함해도 2년마다 TV 중계를 통해 잠깐씩 역도를 접하는 이들은 역도를 잘 모르기 마련이다. 가장 큰 오해는 ‘역도가 아둔한 덩치들이 나와서 힘쓰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역도에선 물론 힘이 중요하다. 하지만 순발력이 매우 중요하다. 호흡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에 얼마나 빨리 바를 들어올리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 몸의 중심잡기 능력도 필수적이다. 김용철 대한역도연맹 생활체육이사는 “역도는 힘과 순발력, 중심잡기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 다른 종목 선수들도 이런 능력을 기르기 위해 역도를 배운다”고 설명했다. 섬세하고 예민하고, 유연해야 잘할 수 있는 운동이다. 아둔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역도는 한계가 없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역도에 흠뻑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경씨는 “얼마나 역도를 즐기느냐, 마음을 잘 먹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오늘 50㎏을 성공했다고 내일 50㎏을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 번엔 들었는데 이번엔 왜 안 될까 좌절하기도 하고, 그래서 스스로 문제를 찾으면서 더 도전하게 되더라고요.”

오늘 50㎏를 들었다면 내일은 51㎏를 들어야 한다. 들 수 있는 무게가 조금씩 늘어갈 때의 희열은 해보지 않고선 모른다. 선영씨는 “중량을 올려서 성공하면, 그 정복감이 크다”고 말한다. 그래서 목표로 삼은 무게를 묻자 “그런 건 없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온다.

좀 더 많은 여성이 역도를 즐기는 것이 두 사람의 작은 소망이다. 더 많은 동호인이 대회에 참여하면 역도를 즐기는 여성을 향한 이상한 시선도 사라질 터. 건강한 몸매를 원하세요? 그럼 역도를 해보세요!

고성=글·사진 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