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위키리크스는 없다?… 외교 電文의 세계, 우리나라는 보안 문제없나
입력 2011-09-22 18:03
외교관은 국익을 위해 주재국에 파견된 ‘공인된 스파이’라는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외교관을 파견하기 위해서는 ‘아그레망’이라는 상대국의 동의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아그레망 통과 뒤에도 해당 외교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국은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를 선언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외교관은 주재국을 떠나야 한다.
까다로운 검증 절차를 통과해 근무를 시작한 외교관은 주재국의 주요 인사를 만나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보고를 본국에 전한다. 외교관이 본국에 보고를 전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외교행낭(파우치)과 전문(電文·Cable)이다.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끼리는 외교행낭에 어떤 물건을 넣는지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국이 알아보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 행낭은 운송의 제약으로 인해 1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때로는 2주일에 한 번씩밖에 주고받지 못한다. 신속성과 보안성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보안성이 요구되는 보고는 대체로 전문을 많이 사용한다. 전문에는 주재국에 대한 정보와 외교관의 평가가 상세히 담긴다. 그래야 본국이 정확한 상황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로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이달 초 인터넷에 추가로 공개한 미국의 외교 전문은 무려 25만건이었다. 미국이 전 세계에 개설한 270여개 해외공관에서 국무부로 보내온 것으로, 한반도 관련 전문만 해도 1만4000건에 달한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전문을 주고받을까. 보안에는 문제가 없을까.
167개 해외공관서 쏟아내는 전문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공관은 올해 기준 167개(대사관 109개)다.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 대사관은 대사를 포함한 직원이 100명
이 넘지만 나이지리아 라고스 분관, 미국 앵커리지 출장소, 러시아 사할린 출장소 등 직원이 1명뿐인 곳도 있다. 해외공관이 보내는 전문은 모두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로 모인다. 외교부에 있는 서버에 날짜와 전송시간 등이 자동으로 저장된다.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우리 외교관이 보내온 전문은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대략 500건 정도. 미국을 포함한 북미가 21% 정도를 차지하고 유럽이 35%, 아시아 12%, 기타 32% 정도의 비율이다. 기자가 외교부에 문의해서 얻은 답변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서 어떤 전문이 오는지, 전문을 저장하는 서버의 크기나 위치는 어떻게 되는지 등은 비공개 사항이다. 특정지역 공관에서 보내오는 전문의 규모가 드러나면 외교관의 활동역량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워싱턴과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 베이징, 도쿄 등이 전문을 양산하는 주요 공관들로 알려져 있다. 특히 중국의 부상과 함께 베이징에서 보내오는 전문의 양이 늘었다고 한다. 반면 이슈가 적은 곳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전문을 보내오는 게 일반적이다. 이슈가 적더라도 대통령 방문 등의 현안이 발생하면 보고하는 전문 횟수도 늘어난다.
기자가 접촉한 여러 전·현직 외교관들에 따르면 전문과 관련된 내용은 이렇다. 민감한 정보가 많이 담기다 보니 전문은 대부분 대외비다. 정부의 문서 분류기준은 3급, 2급, 1급 비밀 순이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핵심적인 내용이 1급에 해당되고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위 인사에 관련되는 사항이 2급이다. 그 외 대부분은 3급으로 처리된다.
비밀로 분류된 문서이니만큼 전문은 본부로 전송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암호화 과정을 거친다. 암호화는 높이 1.5m 정도의 냉장고만한 크기로 난수체계를 바탕으로 한 암호해독기가 담당한다. 각 공관은 물론 청와대에도 전문을 보기 위해 암호해독기가 비치돼 있다.
암호해독기 사용을 위해 외교부는 외교정보통신과 소속 외신담당관을 따로 파견해 기계를 관리한다. 외신담당관의 아이디와 암호를 넣어야 부팅이 되며, 대사라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외교부 관계자는 “규모가 큰 공관은 말할 것도 없고, 3인 공관만 해도 일반적으로 공관장과 영사, 외신담당관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외신담당관이 암호해독기를 전담한다. 하지만 외신담당관이 없는 1인 공관의 경우엔 공관장이 파견 전에 따로 암호해독기 운용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핵심 단초
청와대나 외교부의 안보 관련 정책결정자들은 매일 아침을 주요국에서 보내온 전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외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 기본은 상대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외교 전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문은 암호해독기와 모니터, 프린터 등으로 구성된 시스템을 통해 열람하고 인쇄할 수 있다. 모니터에는 세계 각국 공관에서 보내온 전문이 제목과 시간 등이 포함된 뉴스리스트 형식으로 표시된다. 내용을 얼마나 열람할 수 있는지는 직급 수준에 따라 다르다. 실무자의 경우 자신의 업무와 직접 관련된 것만 볼 수 있지만 국장, 차관 등으로 직급이 올라가면 분야에 상관없이 볼 수 있다.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안보 관계자는 “평소에는 전문을 100여장 열람했는데, 대형 이슈가 발생할 경우 많게는 하루에 300장도 넘게 봤다”면서 “너무 많아서 다 못 읽을 경우 직원들이 중요 부분만 표시해준 것을 봤다”고 소개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관은 “주재국에서 보고한 전문을 보면 우리 외교관이 만난 인사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블러핑(bluffing·과장)을 하는 경우도 눈에 훤하게 들어온다”며 “이럴 때 주재국 외교관의 배경설명까지 곁들여 있으면 상대국의 진심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이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경우도 있다. 이수혁 독일대사는 2005년 9월 26일 독일 사민당의 한 의원과 2시간가량 독일 총선결과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그는 ‘독일총선 전후 정치분석’이라는 제목의 전문을 본부에 보냈다. 전문은 독일 대연정의 가능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마침 여소야대의 상황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이 전문을 본 뒤 “감명 깊게 읽었다. 한국 상황과 비교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참모들에게 얘기했다. 이후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을 꺼내기에 이른다.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대통령이 독일에서 날아온 전문 내용에 주목해 정치적 방향을 결정한 셈이다.
한국판 위키리크스 사태는 불가능하다?
전문을 보내던 수단은 초기에 모스 부호에서 텔렉스, 데이터 통신 등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우리 정부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250억원을 들여 인터넷망과는 별도의 외교정보통신망(Global wide area network)을 구축해 보안성을 한층 더 강화했다. 외교정보 통신망을 통해 지역 사정에 따라 초당 48Kb∼45Mb 속도로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하다.
보안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드웨어 장비 외에, 전문을 볼 수 있는 대상을 특정하는 ‘친전(親展) 전문’을 추가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친전 전문은 전문을 보낼 때 수신인을 지정해 그 사람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부서 내 보안을 유지하면서 장관과 같은 고위 인사에게만 보고할 필요성이 있을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또 다른 안보 관계자는 “한번은 간부회의에서 장관이 자신 앞으로 온 친전 전문을 직접 구두로 설명하며 참석자들과 정보를 공유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아 말썽이 빚어지는 경우도 있다. 2006년 10월 김하중 주중대사는 북한 핵실험과 관련된 정보를 얻어 즉각 도청 방지 장치가 달린 비화(秘話) 전화로 청와대에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전문으로 외교부에도 보고했다. 청와대에서는 긴급안보장관회의가 소집됐으나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은 마침 외부에 있어 이 사실을 즉각 알지 못했다. 영문도 모른 채 청와대에 도착한 반 장관은 이후 핵실험 소식을 듣고 불쾌해하며 김 대사를 책망했다는 뒷얘기가 전해진다.
미국은 9·11 이후 국무부와 국방부 등 관련 기관의 정보 공유가 부족해 테러에 무방비로 당했다는 반성으로 전문을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가 위키리크스 측에 무더기로 유출돼 엄청난 외교적 타격을 입었다. 한국은 안심할 수 있을까.
우리 정부 역시 외교부와 국방부, 국가정보원 등이 안보 관련 정보를 끝없이 생산하지만 미국과 같은 정보공유 체제는 아니다. 해당 부서에서만 열람할 수 있어 외부 유출 가능성이 없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강조한다. 다만 위키리크스 폭로 후 혹시 모를 해커의 침입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외교부가 국정원 등과 함께 보안점검을 실시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우리는 미국과 같은 정보공유 시스템이 구축돼있지 않아 대량으로 전문이 유출될 염려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