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살 큰 울음 414년 전 그날 “필사즉생” 큰 함성… 진도 울돌목

입력 2011-09-21 21:33


은빛 숭어가 떼를 지어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박차고 거슬러 오른다. 썰물 때를 맞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거센 물살이 좁은 해협을 빠져나가느라 서로 부대끼며 울부짖는다. 혹은 물 속의 암초를 만나 소용돌이를 만들고 혹은 물살과 물살이 만나 역류현상을 일으킨다. 조선 수군의 함성인 듯 왜적의 비명인 듯 울돌목의 울음소리가 청명한 가을 하늘에 파문처럼 번진다.

명량해전을 하루 앞둔 1597년 9월 15일(음력). 진도 벽파진에서 해남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충무공 이순신은 두 달 전 원균이 지휘한 거제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 조선 수군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명언을 남긴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뜻으로 실제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직접 왜선을 향해 돌진하는 등 필사즉생의 모범을 보였다.

풍전등화 위기에 처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던 414년 전 그날도 날씨는 맑았다. 쪽빛 가을 하늘은 더없이 높았고 들녘은 황금물결로 출렁거렸다. 왜선 130여 척이 밀물을 동력삼아 해남 땅끝마을 쪽에서 진도 울돌목을 향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이순신이 탄 지휘함이 왜선들에 포위됐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화포와 화살을 비 오듯 쏘며 때를 기다렸다.

순간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밀물과 썰물 사이의 정조(停潮) 시간대였다. 이어 바닷물이 맹렬한 기세로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놀란 왜선들이 썰물에 밀리다 소용돌이 물살을 만나 좌충우돌 서로 뒤엉켰다. 기다렸다는 조선의 판옥선(전투함)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5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대승을 거든 이순신은 그날 밤에 쓴 난중일기에서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었다”고 기록했다. 13척의 판옥선과 오합지졸 조선 수군을 이끌고 왜선 133척을 격파한 전과는 천행 중 천행이었다. 그러나 명랑해전의 승리가 과연 하늘이 도운 천행 때문이었을까.

명량해전의 승리는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난 이순신의 리더십과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도 두렵게 하는 울돌목의 지형 덕분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의 진짜 승인은 목숨을 걸고 음으로 양으로 조선 수군을 도운 민초들의 우국충정이 비장의 무기로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도의 관문인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과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에 위치한 2㎞ 길이의 좁은 해협. 이곳을 통과해야 서해와 남해로 갈 수 있어 울돌목은 사실상 서해와 남해의 경계나 마찬가지인 전략적 요충지이다. 바닷물은 밀물과 썰물 때 평균 폭이 350m에 불과한 울돌목을 통과하면서 조류 흐름이 초속 30m로 빨라진다. 울돌목이 조류발전의 최적지로 꼽히는 이유다.

울돌목은 말 그대로 물이 돌면서 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 쓰면 명량(鳴梁)이다.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인 진도대교가 완공돼 자동차로 울돌목을 건널 수 있지만 조류 흐름이 빨라 배로 울돌목을 건너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근 전남개발공사가 선보인 ‘울돌목 거북배’를 타면 414년 전 명량해전의 현장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다.

해남 전라우수영에서 출발해 울돌목을 거쳐 진도 벽파진을 돌아오는 ‘울돌목 거북배’는 거북선 모양의 유람선. 이순신이 13척의 판옥선을 숨겨놓았다는 명량도를 돌아 나오자 2005년 제2진도대교가 완공되면서 쌍둥이 다리로 거듭난 진도대교가 위용을 자랑한다.

뱃전에서 보는 울돌목의 조류 흐름은 육지에서 볼 때보다 훨씬 생생하다. 좁은 수로를 통과하는 조류가 물 속의 암초에 부딪치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진도 사람들은 20리 밖에서도 이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바다 위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소용돌이치던 조류는 피섬을 만나자 조용해진다. 피섬은 왜군의 피로 물들었다는 작은 무인도.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17일이나 진을 쳤던 벽파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인 ‘이충무공 전첩비’가 홀로 우뚝 서서 바다를 지키고 있다. 진도군민의 성금으로 건립한 전첩비에는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로 시작되는 노산 이은상의 글이 눈길을 끈다.

진도대교를 넘자마자 조우하는 녹진전망대(150m)는 명량해전의 현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강강술래터였던 팔각정에 오르면 울돌목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왜군들의 피로 물들었다는 피섬을 비롯해 벽파진 등 역사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녹진전망대는 ‘섬 속의 육지’로 불리는 진도가 숨겨놓은 수많은 낙조 명소 중 하나. 멀리 섬 중앙의 산 정상에 엄지손가락 모양의 암벽이 솟은 주지도(손가락섬), 발가락 모양의 암벽이 두 개나 있는 양덕도(발가락섬) 등 가사군도의 크고 작은 섬들을 무대로 시시각각 황홀한 풍경을 연출하는 낙조가 사뭇 서정적이다.

414년 전 그날처럼 핏빛보다 붉은 태양이 실루엣으로 가라앉은 섬과 황홀한 입맞춤을 시도하는 순간 섬과 섬,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돼 활활 타오른다. 이어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진도대교가 그날의 영광을 조명하기라도 하듯 화려한 불을 밝힌다.

진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