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느티나무의 추억’ 황금찬 시인 “38번째 시집… 40권 채워야죠”

입력 2011-09-21 17:53


“시인으로 태어났으니 시를 쓰다가 죽겠습니다.”

최근 서울 혜화동 로터리 엘빈 커피숍에서 만난 노(老)시인의 첫마디는 단호했다. 구순을 훌쩍 넘긴 황금찬(94·초동교회) 시인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올해 출간한 시집 ‘느티나무의 추억’(코드미디어)을 건넸다. 그는 “문학은 한평생 하는 것”이라며 “외국 시인들은 나이가 들어도 많이 쓰는데 우리나라 시인들은 나이가 들면 글을 잘 안 쓴다”고 안타까워했다.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헌팅캡을 쓰고 시종 온화한 미소를 지은 노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는 해마다 한 권의 시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느티나무의 추억’은 38번째 시집이며 40권을 채우는 게 그의 목표다.

황 시인의 시에 대한 철학은 뚜렷했다. 시는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를 읽고 화를 내거나 싸울 정도면 그건 시가 아니라 무기”라면서 “사랑과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시라야 진정한 시”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평생 기독 신앙을 바탕으로 한 서정시로 한국시단을 빛내온 그의 삶과 문학 여정을 들어봤다.

황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지만 가난을 벗어나고자 함경북도 성진에 정착했다. 아주 작은 집에 살았다. 7, 8세 때부터 성진 제일교회에 출석했다. 김선주 목사가 시무했다. 교회 부흥회에 길선주 목사가 강사로 왔다. 가진 것도 없는데 집사인 아버지가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길 목사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초대에 응했다. 차가 없을 때라 교회에서 집까지 2㎞되는 거리를 길 목사는 목사 두 명, 장로 두 명과 함께 걸어서 왔다.

당시 길 목사는 일본 사람들에게 너무 맞아 시력이 아주 나쁜 상태였다. 잘 안 보여 만져보고 기도하자고 했다. 길 목사는 처음부터 울었다. “하나님, 당신을 섬긴다는 집이 이렇게 가난해서야 누가 당신을 섬기려 하겠습니까.”

길 목사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두 울어 눈물바다가 됐다. 마지막 무렵 황금찬으로부터 “시인을 목표로 한다”는 말을 들은 길 목사는 “하나님, 작은 금찬이가 시인이 되겠답니다. 제발 이 아이를 길러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 덕분에 시인이 됐다고 생각한다. 길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은 문인은 자신뿐일 거라고 했다. 황 시인은 아직도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준 길 목사를 잊지 못한다.

-글쓰기는 언제부터 했습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썼어요. 1927년 기독교서회에서 나오는 ‘아이생활’이란 잡지가 있었어요. 청소년들을 위해 만들었는데 값이 10전이었어요. 당시 냉면 한 그릇이 10전이었어요. 10전은 적은 돈이 아니었어요. 돈이 없어서 친구와 5전씩 내서 샀어요. 유일한 잡지였지요. 이 잡지에 동시를 썼어요. 그 후 ‘삼천리’가 29년, 동아일보에서 발행하는 ‘신동아’가 31년, 조선일보에서 발행하는 ‘조광’이 35년부터 나왔어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정식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39년 ‘문장’이 처음 나올 때였어요. 문장에서 추천제도를 처음 뒀다고 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을 했어요. 하지만 추천될 줄 알았는데 안 됐어요. 당시는 시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일제 때라 아무개 집에 공부 잘하는 애가 한 명 있다고 하면 2주에 한번씩 고등계 형사가 찾아왔어요.”

형사는 집안을 조사하고 책을 다 뺏어갔다. 절대 글을 못 쓰게 했다. 황 시인의 부모도 자식이 기어코 한다니까 막을 수는 없었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형사가 자꾸 찾아오고, 매 맞고 그랬으니까.

시를 써도 발표할 데가 없었다. 40년 일제에 이름과 글을 다 빼앗겼고 41년 4월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신문과 잡지가 다 폐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조지훈은 42년 박목월에게 “우리는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써도 앞으로 발표할 데가 전혀 없다”며 ‘완화삼’이란 시를 써서 보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황 시인은 너무 슬펐다. 조지훈의 시는 사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목월이 조지훈의 시를 보고 울다가 답장을 써 보낸 것이 그 유명한 ‘나그네’다. 이후 문인들은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 8·15 광복이 찾아온 뒤에야 묻어뒀던 책을 꺼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황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청록파 시인을 사랑한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제일 가까웠던 문우들도 이들 청록파 시인이다. 그들 시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박목월은 39년 ‘문장’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정지용이 추천사를 썼다. 추천사는 이랬다. “박목월씨 당신은 어쩌자고 이런 시기에 릴리시즘을 타고 났습니까. 당신하고 등을 맞대고 소리없이 밤을 새워 울어보고 싶습니다.”

황금찬은 도저히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품을 내지 않았다.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도 작용했다. 오랫동안 문단 데뷔를 하지 못해 고생했던 황금찬은 53년 박목월이 ‘문예’에 추천해줘 등단할 수 있었다. 당시 추천사에서 박목월은 “황금찬씨는 청록파가 목표로 했던 지점에서 출발했다”고 적었다. 고마웠다. 박목월은 황금찬을 시인의 자리에 있게 해 준 은인이자 가장 사랑한 문우였다.

황 시인은 자신이 문단 데뷔에 이처럼 고생한 탓에 후배들을 많이 등단시켜줬다. 그들이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 숫자가 수백 명에 달한다. 황 시인은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한 건 매우 잘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문학인생을 이끌어온 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명감이에요. 하나님이 내게 시를 주셨으니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성경을 시화한 것이 더러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아요. 제 사명은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기독 문인들은 ‘내가 사는 것이 기독교적으로 봤을 때 법도에 맞는가’를 늘 생각해 법도에 어긋났다고 하면 되도록 하지 않는 게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신앙시와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시인이 있다면.

“박목월 선생이에요. 그가 펴낸 ‘크고 부드러운 손’이란 시집에 신앙시가 78편 실렸어요. 세상 떠나고 나왔는데 내가 낸 ‘기도의 마음자리’란 시집에 신앙시가 80편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한사람이 좋든 나쁘든 신앙시를 한데 모은 것이 80편이 된 것은 처음이에요. 박목월 선생이 한 것이 먼저 나왔으므로 박목월 선생이 최고지요.”

-기독교가 한국 문학에 끼친 영향은.

“우리나라 문학은 미국, 캐나다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왔어요. 이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꽃을 피운 거예요. 성경만 가져온 것이 아니고 아동문학 등 다른 것도 많이 가져왔어요. 기독교와 문학은 떼어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꿈을 꿀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려줬어요. 선교사들의 영향이 절대적이에요. 저도 데뷔 때는 아동문학을 했지요. 다음은 고향 사랑, 꽃 사랑 등 정적인 것들을 다뤘어요. 그러다 신앙적인 내용을 담은 신앙시를 쓰고 있지만 지금도 정적인 것을 쓰긴 해요. 시가 바뀔 때가 있어요. 낭만에 관한 것을 쓰다 지적으로 바뀐다거나.”

-삶을 짧은 시구로 표현한다면.

“슬픔이에요. 행복하게 산 사람도 있겠지만 엄밀히 보면 행복하게 산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다 슬픔 속에 있었지요. 인간의 삶을 즐거움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비관적이죠. 내가 그렇게 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이가 많아지면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요.”

-유명 시인으로 살아오며 아쉬운 점,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지방에 가면 국민시인이라고 불러요. 지난해 시인들이 내 이름을 ‘시성’이라고 지어줬어요. 전국에 내 시비가 9개 정도 있는 걸로 아는데 부끄러워요. 시는 많이 지었어도 좋은 시는 없어요. 굉장히 시를 잘 쓰고 싶은데 잘 안되는 것이 가장 안타까워요. 이름이 알려졌다는 게 좋은 점보다 불편한 점이 더 많아요. 이제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전보다 덜해요.”

-삶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남을 헐고라도 내가 잘 돼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돼요. 내가 잘 안 돼도 밀 수 있다면 저 사람을 위해 밀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해요.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지요.”

-매스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전자책이 발달하고 있는데.

“이런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앞으로 종이책이 없어질지 모른다고 해서 심각해요. 전자책이 발달하면 좋은 것은 많은 사람이 읽게 된다는 점이에요. 일본도 전자책 때문에 옛날 같지 않게 책이 안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나쁜 의미로만 생각할 게 아니에요. 나쁜 점은 기계가 인간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언제든지 인간이 기계를 사용할 수 있게 돼야 해요. 이게 바뀌면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할지 모르지요.”

-문학의 미래를 예견한다면.

“앞으로 좀더 발전할 것이라고 봐요. 현재 우리나라는 문학작품을 너무 안 읽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좀 더 읽게 되리라 전망해요. 지금보다 돈 덜 들이고 쉽게 책을 손에 들 수 있는 길이 올 거예요. 문학의 밝은 미래를 위해선 독서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해요. 그리고 이 문학작품을 읽을 경우 이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식의 가이드가 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다른 사람이 ‘참 좋은 작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을 몇 편 쓰는 것이에요. 지금까지 써온 것이 수천 편에 달해요. 하루 종일 시를 써요. 옛날에는 잠을 덜 잤는데 지금은 더 자진 않지만 쉬는 시간이 많아요. 현재 못 쓰고 있는 건 다 쓰고 싶어요.”

황 시인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말도 남겼다. “열심히 읽고 듣고 써야 해요. 그래야 ‘자리’가 만들어져요. 제일 중요한 게 읽기이고 그 다음이 쓰는 거예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커피숍을 나서는 노 시인에게선 여전히 정정한 시혼(詩魂)이 느껴졌다.

■ 황금찬 시인은

1918년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속초에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어 만주로 가려고 했다. 걸어서 한없이 간 곳이 함북 성진. 만주는 너무 멀어서 갈 수가 없었다. 거기서 노동을 하며 살았다.

이때 마을 노인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글을 읽으면 1전씩 준다고 해 친구들과 함께 글을 읽었다. 당시 연필 한 자루 값이 1전이었다. 한 노인이 어린 금찬을 따로 불렀다.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묻더니 도시로 나가라고 권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렇지 않다. 어부는 좋은 직업은 못 된다”는 것이었다. 거기 살면 어부밖에 할 게 없었다. 이것이 그가 시인이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다 기회가 있어 43년 일본 대동학원에서 유학했다. 죽을 지경으로 어려운 때였다고 했다. 일본 사람 밑에서 온갖 험한 일을 다 했다. 당시 일본은 도쿄 시내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없었다. 한국 유학생들이 대변통을 들고 다녔다. 그도 화장실을 치우며 유학시절을 보냈지만 졸업은 못했다. 광복을 이북에서 맞이했다. 46년 3월 강릉으로 왔다. 강릉농고에서 교사로 지내던 중 6·25가 터졌다. 대구에서 무사히 6·25를 넘겼다.

47년부터 월간 ‘새사람’, 48년 ‘기독교 가정’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51년 시동인 ‘청포도’를 결성했다. 53년에는 박목월의 추천으로 ‘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다시 55년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데뷔했다. 65년 첫 시집 ‘현장’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시 38권, 수필 24권을 출간했다. 68년 중앙신학대 기독교문학과 교수, 80년 추계예술대 강사로 재직했다.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한민국문화보관훈장, 2007년 팬특별문학상, 2008년 시학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글 최영경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