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단꿈’ 가수 BMK “신랑 별명은 목사님!”

입력 2011-09-21 17:14


들어오자마자 버럭 화를 낸 여자가 가수 BMK(본명 김현정·38)였다. “일 못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 발라드만 해서 펑키를 못 한다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음악 못하면 죽어야 돼.” 그의 변주 요구에 연주자가 “난 그런 거 못 한다”며 버틴 모양이었다. 서울 강남의 노래 학원에서 원장인 BMK는 여직원을 붙잡고 한참 울화를 토했다. 날을 잘못 잡았나 싶었다. 지난 2일 오후였다.

“자기 파트(분야)에서 전문적이고 유능하게 일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은행 업무 볼 때만 해도 창구 직원이 똑 부러지게 처리해주면 기분 좋잖아요. 음악을 직업적으로 하면서도 안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저도 음악을 하니까 기대치에 못 미치면 아까처럼 험한 말을 하죠.” 그는 헤식게 웃었다.

10년차 대중가수인 그는 MBC ‘나는 가수다’(나가수)에서 어느 때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 그의 노래가 들리면 사람들은 ‘누구야?’ 묻지 않는다. 맨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늘었다.

“목욕탕에 때 밀러 갔는데 홀딱 벗고 알아보면 어쩌자는 거야(웃음). 저 대중목욕탕 이용하거든요. 얼마 전에 일부러 딴 동네 갔는데도 알아보시더라고요. 연예인들이 목욕탕 안 갈 만해요.”

그는 어김없이 머리카락을 꼬고 나타났다. “3일째인데 오늘 푼다”고 했다. 평소엔 긴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산다. 무대 위나 카메라 앞에 설 때만 꼰다. 소속사는 매년 “머리 풀고 활동하겠다”는 그를 “왜 그러시느냐”며 말린다. 레게머리를 푼 모습은 몇 장의 결혼사진으로만 공개됐다.

“풀면 다른 사람 같아요. 너무 여성스러워서 제 음악이랑 안 어울린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땋고 있었는데도 안 상했다’며 놀라요. 신랑이 제 생머릴 좋아해서 같이 있으면 풀어요.”

그는 지난 6월 결혼했다. 남편 맥시 래리 디렐(45)씨가 미 공군 헬기 조종사 출신이어서 더 관심을 끌었다. 2008년 7월 미술 전시회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디렐씨가 전화번호를 따 갔다. 그는 경기도 성남의 미군 부대에 근무 중이었다.

BMK는 “영어를 못하는데도 첫 데이트 때부터 공감이 잘 됐다”며 “가랑비에 옷 젖듯 프러포즈(청혼)를 받았다”고 했다. 2009년 귀국한 디렐씨는 지난해 전역하고 주한미군 군무원으로 돌아왔다.

-외국인과 결혼하는 게 두렵지 않던가요.

“언어가 완벽히 안 통하는 것 말곤 없었어요. 그건 신랑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신랑이 한국말을 잘 못해요. 요즘 제가 가르쳐줬더니 안 좋아요. 어디 같이 가서 볼 일 끝나고 일어서는데 평소 ‘레츠 고(Let’s go)’ 하던 신랑이 ‘가자’ 그러는 거예요. ‘헉’ 했죠.”

-명절에 시댁 안 가서 좋겠습니다.

“저는 국제결혼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어요(장난스런 웃음). 내년에 봬야죠. 전화 통화는 자주 해요. 시댁엔 작년에 처음 갔었는데 아버님이 절 예뻐하셨어요. 길 가다가 아버님이랑 춤도 추고. 신랑은 그런 아버님이 의외였나봐요. 신랑 동생들도 결혼해서 며느리들이 있는데 그렇게 예뻐하신 적이 없었대요.”

BMK가 가족에게 디렐씨를 소개한 건 2008년 추석 때였다. 전화로 운을 뗐다. “엄마, 가져갈 선물이 너무 많아서 친구랑 갈 거야. 그러니까 놀라지 마.” 갈비짝을 대신 들고 간 친구가 디렐씨였다.

“모든 식구가 처음부터 대대적으로 환영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주셨어요. 큰 사건이 벌어진 것처럼 반응한 사람은 없었어요. 그것보다 엄마가 영어를 잘한 게 식구를 놀라게 했죠.”

어머니는 딸의 결혼을 못 보고 2009년 암으로 숨졌다. 50대 후반이었다. 3년간 투병했다. 어머니가 숨지던 날 디렐씨도 함께 있었다. 그가 위독한 어머니를 안아 병원으로 옮겼다.

“엄마는 뭐랄까, 포기를 안 하셨어요. 유언도 안 남겼어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극복하려고 하셨어요. 좋은 날엔 그래서 더 속상해요. 다 포기하고 계시다 돌아가셨으면 모르겠는데.”

어머니는 BMK가 음악에 매료당한 환경을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클래식 음반이 집에 가득했다. 초등학교 음악교사였던 어머니는 성악가가 어릴 적 꿈이었다고 말했었다. 어린 BMK가 추종하던 인물은 베토벤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같은 클래식 음악가들이었다.

“저한텐 그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이었어요.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사처럼 큰 책들이 집에 있었는데 음악가 흉상 사진이 실린 음악 해설서였어요. 거기에 자를 대고 칼로 쭉쭉 그어서 사진만 잘랐어요. 연예인 브로마이드처럼 사진첩을 만들려고요. 엄마한테 날아차기로 엄청 맞았죠.”

집에 우환이 있다는 거짓말로 조퇴해 종일 음악을 듣기도 했다. 부모는 교사여서 낮엔 외할머니가 돌봤다. 종종 용돈으로 음반을 샀다. 뭔지도 모르고 들은 음악은 재즈였다.

“엄마는 제가 고집 센 녀석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많이 내버려두셨어요. 우린 늘 친구 같으면서 라이벌 의식 같은 게 있었어요. 엄마가 하고 싶던 노래를 제가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남들 앞에서 노래한 건 초등학생 때부터였다. 합창부원이었다.

“대중가수가 될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노래를 좋아할 뿐이었거든요. 그땐 음악 하는 유일한 길이 성악가였어요. 중학교 때 정식으로 레슨 받으면서 꿈을 많이 키웠죠. 고교 초까지도 성악가의 꿈을 못 버리고 있다가 막판에 대학 진로가 바뀌었어요.”

1992년 살던 강원도 속초의 동우대 유아교육과에 진학했다. 고교생 때 부모가 이혼했다. 중고등학생인 동생들을 돌보려고 집에 남은 것이었다. 성악과를 고집하면 다른 지역으로 가야 했다.

-왜 하필 유아교육이었나요.

물으면서도 격의 없고 익살스러운 그가 유치원 교사에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었다.

“교사인 부모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음악이랑 미술도 포함돼 있고요. 제가 아이들에게 애정이 있는지 그때까진 몰랐어요. 유치원 실습 나가서 직접 만나보니까 눈높이가 똑같은 거예요. 대화가 잘 통했어요. 실습 내용으로 특수아동 사례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평가가 좋았어요.”

속초 콘도업계가 성황일 때 여대생 BMK는 노래로 용돈을 벌었다. 레스토랑 커피숍 라운지 등에서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아르바이트가 많았다. 그는 잠시 뜸들이다 ‘슈퍼우먼’이 된 얘기도 했다.

“슈퍼마켓에서 도둑 잡는 거예요. 감시카메라가 없을 때니까 대학생을 중간 중간 심어놔요. 꼬마들이 주머니에 뭐 넣고 가지 않나 감시하는 건데 실제 잡기도 했죠. 치어리더도 했어요.”

BMK는 체격이 늘 또래보다 커서 일반 치수의 옷을 입은 적이 없다고 했다. “동별, 시별 대항 체육대회를 하면 우리 과로 문의가 들어왔어요. 어머님 아버님들께 응원 구호랑 춤을 가르쳤어요. 그땐 지금처럼 짧은 치마 안 입었어요. 그냥 통일된 옷이었어요. 돈도 많이 받았어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니까 지역 대표님들이 예뻐하시면서 목욕비도 주시고요.”

그는 96년 3월 설악산 인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조수석에 탄 승용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중앙선을 넘었다. 관광버스와 정면충돌했다.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 가던 길이었다. 가장 크게 다쳤다.

“다 부러졌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가 너무 많이 부서져 십자인대가 파열됐는지도 모를 정도였어요. 2009년 무릎 수술을 받은 게 그것 때문이에요. 지금도 날이 궂으면 두통이 너무너무 심해요.”

서울로 이송된 BMK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몇 달간 누워 있었다. 둘째 동생이 그해 개원한 실용음악학원 서울재즈아카데미 지원서를 내밀었다.

“돈이 들어서 어떻게 할까 하는데 보험사 합의금이 입학금이랑 똑같은 거예요. 10원도 안 달랐어요. ‘이건 그냥 가라는 거구나’ 싶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합의서에 사인했죠.”

BMK는 재즈아카데미 졸업 후 그곳 강사로 일했다. 수원여대 백제여대 등에도 출강했다. 무대에선 ‘재즈 가수 김현정’이었다. BMK로 이름을 알린 건 2002년 리쌍의 ‘인생은 아름다워’와 김진표의 ‘아직 못 다한 이야기’에 객원 가수로 참여하고서다. 1집 음반을 녹음 중일 때 연락을 받았다.

“그게 활동이 될 줄은 몰랐어요. 반응이 그렇게 좋을 줄 몰랐죠. 제가 없으면 활동을 못하니까 조금만 더 도와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제 앨범 발매가 밀렸어요.”

첫 음반은 이듬해 나왔다. 가사를 직접 쓴 타이틀곡 ‘떠나버려’로 활동할 때부터 그는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였다. 2005년과 2007년 2, 3집을 냈다. 지난 5월 초 임재범 김연우와 함께 투입된 나가수에서 부른 첫 곡 ‘꽃 피는 봄이 오면’은 2집 타이틀곡이었다. 부축 받고 내려온 BMK는 방송에서 “어떻게 노래했는지도 기억 안 난다”고 했었다. 폭식으로 경연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늘 상추쌈을 먹었어요. 힘도 달리고 잠도 자야겠고. 쌈을 먹으려면 고기가 있어야 하니까 결과적으로 육류 섭취가 굉장히 늘었죠. 다른 출연자는 대부분 말라갔어요. 저만 몸무게가 늘었을 거예요.”

나가수 출연 중 결혼한 BMK는 신혼여행을 미뤘었다. 지금은 연말까지 꽉 찬 일정 탓에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신혼생활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신랑은 제 그림을 앤디 워홀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추상화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건데 신랑이 좋아해서 액자로 만들어 집에 걸었어요. 누구나 그렇잖아요. 콩깍지 씌면 다 좋아 보이는 거. 신랑은 제 음악, 제 능력을 제가 가진 것보다 크게 봐 주는 사람이에요. 옆에 있는 사람이 가치 있게 봐 주니까 ‘정말 그런가?’ 생각하게 돼요. 저 자신을 다시 보게 되는 거죠.”

-단점은 이야기 안 하나요.

“언어 소통이 완벽하지 않아서 나쁜 얘기 할 겨를이 없어요. 상처 주려고 시시콜콜 말꼬리 물고 늘어질 일이 없는 거죠. 말싸움도 말이 줄줄 나와야 하지. 얼마 전 싸우다가 제가 화내니까 신랑이 성경을 펴더니 읽어보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마태복음이었어요.”

-남편이 독실한가 보군요.

“별명이 목사예요. 저도 어릴 때부터 다녔지만 좀 날라리였는데 신랑 만나고 나서 더 열심히 다녀요. 주변에선 ‘래리가 너랑 결혼하고 싶어서 십일조가 아니라 십삼조는 했을 거’라고 해요.”

이태원에 신혼집을 차린 부부는 동부이촌동 충신교회에 나간다. 그전엔 각자 다른 교회를 다녔다.

-다문화가정이 된 셈인데 어떤가요.

“결혼할 때 주위에서 ‘그럴 줄 알았어’ ‘잘 어울려’라고 긍정적으로 얘길 많이 해주셨어요. 축복받는 국제결혼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책임감이 생겨요. 건강하고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외국 남자를 사귀는 여자 분들이 더 축하해주세요. 따가운 시선이 많았기 때문일 거예요.”

학원 복도엔 음반 30여장이 진열돼 있었다. 소녀시대 2AM SG워너비 서인국 김태우 테이 홍경민 윤종신 등 대부분 다른 가수들 것이었다. 표지엔 친필 사인과 함께 한마디씩 적혀 있었다.

BMK는 “그 친구들이 방송국에서 만났을 때 준 거”라며 “소녀시대 윤아가 쓴 말이 가장 귀엽다”고 했다. 음반 속지의 윤아 사진 위엔 ‘BMK 선배님 노래를 요즘에도 매일매일!! 듣고, 자장가로도, 이동시간에도, 꼭 듣고 있는 소녀입니다! 가사도 노래도 너무 좋아요. ㅠ.ㅠ’라고 쓰여 있었다.

-BMK 음악을 하루 종일 듣는다는군요.

“거짓말이죠. 어떻게 제 노래를 자장가로 들어요? 자다가도 깰 텐데”라면서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글 강창욱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