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테레사] 우리집 거실의 비천도

입력 2011-09-20 17:34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천장에는 비천도(飛天圖)가 있다. 이 집에 처음 들었을 때, 식탁 주변 천장의 조명기구를 중심으로 좀 어색한, 의미 없는 빈 공간이 있어 천사들이 춤추는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다. 화가들은 가끔 빈 데가 있으면 견딜 수 없어하는 버릇이 있다.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몇 년 동안 그 천장의 그림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 그림을 헤드에 넣은 내 편지지가 예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천장 그림과 연결하는 사람은 없었다. 둘러앉아서 저녁이나 먹으면 가끔 천장 그림이 화제가 되는 수가 있어도 그 그림이 내 그림인 줄은 상상도 못하고, 집에 붙어온 것이냐고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은 아주 다른 반응을 보인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대번에 이 천장 그림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아이들은 벽에 있는 그림이든, 바닥에 놓인 것이든 장소에 상관없이 두리번거리면서 그림을 찾아내고, 또 그림에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기억하면서 자기의 의견을 얘기하거나 질문한다.

한 번은 제자가 어린 딸을 데리고 왔는데, 마침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아이에게는 새로 나온 내 화집을 보여주고는 한참동안 혼자 놀게 놔두었다. 이 아이는 화집을 한 장도 빠뜨리지 않고 들여다보다가 어느 페이지에는 종이쪽지를 끼워 놓고는 다시 바쁘게 다른 짓을 하고 놀았다.

어른들이 일이 끝나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자, 이 아이는 곧 그 화집을 가져와 표시해 놓은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나를 방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쪽 구석에는 표구도 하지 않은 채, 별로 나타나지 않게 세워놓은 캔버스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화집에서 발견해서 표시해 놓은 원본 그림이 놓여 있었다. 화집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내 집안의 어느 곳에서 발견했다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화집에 프린트 되어 있는 딱지만한 작은 그림과 100호 가까이 되는 큰 캔버스의 그림을 의심 없이 연결하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어른들의 경우 실제 그림과 프린트된 화집의 작은 그림을 짝지어 맞추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시각적 수용이 얼마나 많은 다른 주위의 사정에 영향을 받는가를 말해준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한 시각적 기억을 수용함으로써 그 기억의 재생에 변화가 없는 반면 어른들에게는 경험과 학습으로 생긴 포맷으로 여과해서 기억한다. 기억의 재생에는 형태보다 더 많은 개념이 군더더기로 붙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본능적 느낌에 가까운 것이고, 누구나 같은 느낌을 갖게 마련인데, 여기에 개념이 붙어버리면 혼란해진다. 아이들은 학습이나 개념 이전의 동심이 있기에 감각이 더 순수하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의 뜻을 이제 알겠다.

김테레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