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득 과세도 확대” VS “투자 움츠러들 것”… 부자증세 논쟁 들끓는 美·유럽
입력 2011-09-20 21:44
미국과 유럽에서 부자증세 논쟁이 ‘전쟁’ 수준으로 뜨거워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이른바 ‘버핏세’를 제안했다. 연간 100만 달러(약 11억원) 이상을 버는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 적자인 재정을 확충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달 뉴욕타임스(NYT) 칼럼에서 부자증세를 주장한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이름을 따왔다.
미 공화당은 ‘계급투쟁하자는 거냐’며 즉각 반발했다. 공화당은 버핏세가 재정난 해소에 도움이 될 만큼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바마의 제안이 경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년 대선을 앞두고 중산층의 표심을 겨냥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에 따라 부자증세가 재정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부자는 지금도 세금 많이 내”=보수 성향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특집기사에서 미국의 부자들은 이미 세금을 많이 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8년 기준으로 소득 상위 1% 부자가 연방 소득세의 38%를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WSJ는 특히 소득 상위 1%는 2008년 모든 국가 소득의 20%만을 벌어들였다면서 부자들이 소득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WSJ는 오히려 부자에게 지나치게 세금을 의존한 게 재정적자 문제를 불러일으켰다는 입장이다. 부자들의 소득은 경기가 좋을 때는 급격히 늘고 반대 경우에는 큰 폭으로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부자에게 세금을 더 많이 의존하는 정부는 경기 침체기에 걷을 수 있는 세금이 줄어든다. 세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WSJ는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미 캘리포니아 주를 사례로 들었다. 캘리포니아에선 소득세의 약 절반을 소득 상위 1%가 부담하고 있다.
이에 대한 ‘부자증세론자’의 반론은 과거에는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냈다는 것이다. 주요7개국(G7) 대부분의 최고소득세율이 1981년에는 60∼70%였지만 2000년대 들어 40% 안팎으로 떨어졌다. 미국 세금정책센터(TPC)에 따르면 미국의 1960∼70년대 최고 소득세율은 70%였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떨어져 현재는 35%다.
제프리 오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세정책 책임자는 “세율 감소로 부자들이 혜택을 입었다. 세금 체계는 80년대 중반 이후 덜 급진적인 것이 됐다”고 말했다.
◇부자 증세 효과도 이견=미 인터넷언론 허핑턴포스트의 최근 가상 분석에 따르면 부자증세 효과는 결코 작지 않다. 소득 상위 1%에게 소득세를 50% 부과할 경우 정부가 얻을 수 있는 수입은 8430억 달러(약 920조원)다. 소득 하위 50%에게 똑같은 세율을 적용할 경우 얻는 5370억 달러(약 580조원)에 비해 훨씬 많다.
상위 1% 고소득자에게 한시적으로 최고 50%의 소득세율을 적용하고 있는 영국 재무부는 연간 27억 파운드(약 4조7000억원)의 예산을 더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순진한 발상이란 게 부자증세 반대론자의 시각이다. 정부의 납세 압력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저항도 커진다는 것이다. 소득을 숨기거나 세금을 덜 내는 다른 나라로 떠나는 부자가 나올 수 있다. 영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재정연구소(IFS)의 폴 존슨은 “소득세율 50%는 너무 높다. 오히려 세금 수입이 감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IFS는 재무부가 세금을 걷는데 오히려 연간 5억 파운드(약 8700억원)를 더 지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IFS가 보는 적절한 소득세율은 40%다.
재정적자 문제는 부자들의 희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므로 중산층에 대한 세금도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2008년 미국 CEO 연봉 1위인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그룹 회장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기고한 글에서 “2%의 부자에게서 세금을 더 걷는 것만으로는 연 1조3000억 달러에 이르는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금을 더 낼 수 있지만 단서가 있다. 중산층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본이득 세율도 높여야”=임금소득뿐 아니라 자본이득에 대한 과세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오바마가 ‘버핏세’를 도입하자는 것도 바로 이 차원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거래로 얻은 차익과 배당금 등에 대한 소득세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자본이득에 대한 세율은 15% 수준이다. 중산층의 근로소득세율보다 낮다.
워싱턴포스트(WP)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자본이득의 80% 이상이 미 국민 5%에 돌아갔다. 더 나아가 자본이득 가운데 50%는 불과 0.1% 부자들의 차지였다. 크리스 반 홀렌 민주당 상원의원은 “자본이득 세율이 근로소득세율에 비해 낮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문제를 공화당과의 협상 테이블에 올리겠다”고 했다. 그는 재정적자 감축을 논의할 미 의회 특별위원회 의원 12명 가운데 한 명이다. 자본이득세율도 근로소득세율과 마찬가지로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지나면서 낮아졌다. 1997년 자본이득세율은 30%대였다.
자본이득 세율 인상에 반대하는 측은 세율을 높이면 부자들이 투자를 줄여 결과적으로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화당 소속인 존 베이너 미 하원의장은 최근 증세 불가 입장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했다.
◇전망=부자증세 논쟁은 한동안 더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재정난을 겪고 있는 각 나라 정부는 부자증세 정책을 강하게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스페인은 지난 16일 올해와 내년 한시적으로 부유세를 재도입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스페인 국가부채는 14년 만에 최고 수준인 국내총생산(GDP)의 65%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도 연 50만 유로(약 7억6000만원) 이상 고소득자에게 3% 특별세를 부과하는 안을 추진 중이다.
일반 여론이 대부분 부자증세를 지지하고 있어 정책 자체에 대한 반발은 거세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부자증세가 실질적으로 효과를 낼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영국 경제학자 20명은 최근 정부에 50% 소득세율을 철회하라고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지나친 부자증세 정책은 오히려 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부자증세가 현 재정·금융위기에서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데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각 나라 정부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