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추계예대에 걸린 대자보
입력 2011-09-19 21:20
서울 북아현동에 자리한 추계예대는 작은 학교다. 역사가 40년 가까이 됐는데도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다. 무분별한 규모의 확대보다 미술과 음악, 문학, 영상 등 네 분야로 특화했기 때문이다. 인기 드라마 ‘공주의 남자’ 주인공 문채원이 이 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는 게 뉴스가 될 정도다.
요즘 이 학교가 뿔났다. 교육과학기술부의 대학평가에서 등록금대출과 정부재정지원을 제한하는 명단에 오른 것이다. 다른 항목도 평가가 좋지 않지만 취업률 19.25%가 치명적이었다. 교수들은 대자보를 걸었고, 학생들은 인사동 등지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추계예술대학교 제자들에게’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어느 미대 교수가 붓을 들었는지, 서예로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거기에 분노와 절망을 조용한 어조로 담았다. “여러분을 부실 대학생으로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획일적인 잣대로 예술가와 예술대학을 모욕하고 폄하하는 이 상황에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직업을 기꺼이 내려놓겠습니다.”
健保가입자와 예술가의 차이
사퇴를 결의한 교수의 연명부를 보니 낯익은 이름이 많다. 미술학부의 석철주 최진욱 강승희 서정희 박순철 교수는 우리 화단의 기둥들이다. 영상문화학부의 김희재 교수는 영화 ‘실미도’와 ‘한반도’ 등의 각본을 쓴 분이다. 문화예술대학원의 박은실 교수는 ‘서울숲’ 아이디어를 낸 주인공이다.
학생들은 ‘무직자 명단’을 내걸어 항의했다. 찰리 채플린과 레프 톨스토이, 루치아노 파바로티, 파블로 피카소의 사진에 ‘무직’이라는 도장을 꽝 눌렀다. 자신이 공부하는 분야에서 불세출의 스타로 인정받는 그들도 취업으로 따지면 무직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시위가 일반의 공감을 얻는 것은 예술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교과부는 대학평가에서 취업률에 20%의 가중치를 뒀고, 취업여부는 졸업 후 1년 내의 직장건보 가입자로 정했다. 건보가 없는 곳은 일자리로 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예술을 대하는 국가의 입장이라면 부끄러운 일이다. 예술가는 정규직 취업이 어렵고, 들어갈 직장 자체가 별로 없으며, 정규직이 아닌 인간은 쓸모없다는 논법은 얼마나 야만적인가. 예술은 그저 번거로울 따름이고, 문학과 음악과 미술 없이도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일찍이 예술교육의 특성을 알았기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만들어 각급학교에 예술강사를 보내고 있다. 이들의 정규직 취업이 개인 능력 이전에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런 정책을 도입한 것이다.
교과부의 이런 잣대는 청년실업을 해결하려는 정책과도 배치된다.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가 최근 펴낸 ‘문화로 먹고살기’에서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문화생산자나 기획자로 살고 싶어 하고 경쟁력도 충분하다”며 문화산업을 한국경제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문화산업이 성장동력인데…
실제로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문화적 열정으로 충만하다. 그들에게 예술은 삶의 존재 이유다. 낮에 알바를 하며 생활비를 벌면서도 밤에 연주를 하면 행복해한다. 학원 강사를 하면서도 개인전을 준비한다. 차가운 원룸에서 식빵을 뜯으면서 문단 데뷔를 꿈꾼다.
문화예술은 사람의 영혼을 담는 영역이다. 수출하지 않고, 직장건보에 들지 않아도 공동체에 기여할 길이 많다. 작업이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고 잉여인력으로 봐선 안 된다. 평생 비정규직으로 떠도는 젊은 예술가들을 부축하지는 못할망정 가슴에 못을 박아서야 되겠는가.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