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배금자] 집단소송이 보내는 메시지
입력 2011-09-19 17:48
“공동소송 확산은 국민경시 책임 물으려는 시대변화…징벌적 배상제 도입 필요”
예고 없는 단전조치로 각종 유무형의 피해를 당한 국민들이 한국전력공사와 정부당국의 처사에 분노하며 집단소송을 불사할 태세다. 한전과 당국은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여 전국적으로 동시에 정전이 발생할 상황, 이른바 ‘블랙아웃’을 막기 위해 부득이하게 예고 없이 30분씩 순환정전을 한 것이며 매뉴얼을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매뉴얼은 아주 낙후된 것이고 9월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상황에서 전력 수요예측을 못했다는 것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사전예고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당시 상황이 긴박하였는지도 쟁점이 될 것이다.
산업현장과 가정, 사무소 등 곳곳에서 엄청난 피해를 본 국민에게 ‘전기의 수급 조절 등 부득이한 경우 전력의 제공을 중지 또한 제한한 경우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약관 규정이 있어 면책된다는 주장을 하는 한전에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자 한전은 5시간 정전에 가구당 800원(한 달 4만원 전기요금 기준시)의 보상안을 제시하였으나 국민의 분노가 오히려 더 커지는 상황이다. 약관규제법상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법률상의 책임을 배제하는 조항’은 무효이므로 한전에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다면 면책이 허용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번 사태의 책임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최근 들어 다수의 피해자들이 기업 등을 상대로 집단소송(정확히 말하면 공동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네이트 해킹 등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들에 의한 소송, 애플사의 위치정보 수집에 대한 아이폰 가입자들의 소송, 우면산 산사태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제기한 소송 등 유사 피해자들이 공동원고단을 결성하여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형태가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국민들의 권리의식이 더 높아지고 정의에 대한 갈망, 국민을 무시한 기업이나 정부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는 국민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는 이렇게 변했는데도 우리 사법부는 여전히 친기업적 정서에 머물러 있다. 국민의 권리침해에 대한 구제나 악덕 기업에 대한 응징의 의지가 약하며, 국민의 열망과 기대를 외면하는 판례를 내놓고 있다. GS칼텍스와 옥션의 대규모 개인정보유출 사건에서 법원은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 있지만 위자료를 지급할 만큼 정신적 손해는 아니다”면서 원고청구를 기각함으로써 국민의 개인정보보다 대규모 정보를 유출한 기업을 적극 보호하였다. 국민은행 등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에 관련된 다른 사건에서 법원이 피해자들의 정신적 손해로 인정한 금액은 고작 1인당 1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기업이 패소한 경우에도 배상액이 이렇게 적다보니 거대 기업은 코웃음을 치고, 피해자는 더욱 농락당하는 기분이 된다. 영미법계 국가는 민사소송에서 징벌적 배상을 통해 악질적인 행위자를 응징하고 재발 방지 목적을 구현하고 있다. 징벌적 배상액은 통상 보상적 배상액의 10배까지 허용하고 있으나 담배회사의 흡연자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윌리엄스 사건에서는 실질손해의 150배에 달하는 징벌적 배상액이 내려졌다.
우리나라에도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어왔는데 최근 하도급법에서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 행위에 대해 실손해의 3배에 달하는 징벌적 배상을 명할 수 있는 제도를 처음 도입하였다. 권력과 금력을 가지고 우월적 지위에서 횡포를 부리는 거대기업 등에 맞서 시민들이 싸울 수 있는 무기는 영미법계의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배상제이다.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권리에 대한 경시와 인격적 모욕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형태로서의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이며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의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집단소송을 통해 분출되는 국민의 메시지는 국민에 대한 경시와 인격모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을 존중하는 국가라면 마땅히 이러한 메시지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배금자(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