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의 정신 (下)

입력 2011-09-19 17:45


루터 “부유한 교황이여, 왜 가난한 신도 돈을 뺏나”

“동전이 궤짝에 짤랑 하고 떨어지면, 그 즉시 영혼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간다.”

수도사 테젤이 면죄부를 팔며 한 말이다. 그는 모금 귀재였다. 서커스를 앞세워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면죄부의 효과를 선전했다. 원래 면죄부는 교회에 죄를 지었을 때, 교황이 처벌을 면해 주는 것을 뜻했다. 이런 면죄부가 왜곡되어 돈을 받고 온갖 죄를 사해 주는 증명서가 되었고, 교회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1515년부터 시작된 테젤의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는 마인츠의 신임 대주교를 향해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의 논박문을 작성해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다 붙였다. 루터는 로마 교황에게 이렇게 따졌다.

“가장 부자였던 크로이소스 왕보다 더욱 부유한 교황이 성베드로 성당을 자신의 돈으로 짓지 않고 가난한 신도에게서 돈을 뜯어서 짓는 이유가 뭔가?”(86조)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인 후 파장은 급속도로 번져갔다. 대주교와 테젤이 이 반박문을 로마에 재빠르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루터의 반박문은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되어 퍼뜨리는 것처럼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로마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반대하자 카예탄 추기경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로 보내 루터를 심문했다. 추기경이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자,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에게서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했다.

결국 1520년 11월 로마 교황은 루터의 견해를 41항으로 정죄하고, 60일간의 근신을 명하는 파문 교서를 공표했다. 그러나 한 달 뒤 루터의 대응은 충격 그 자체였다. 루터는 파문 교서의 사본과 교회법전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렸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불을 지른 것이다.

그 사이 신성 로마제국의 새 황제가 된 카를 5세는 보름스로 루터를 소환했다. 루터는 1521년 4월 17일 보름스 제국의회에 섰다. 젊은 황제는 루터의 의견을 철회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루터는 황제에게 담대하게 맞섰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하는 것은 위험하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안전보장을 약속한 덕분에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위험했다.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 루터를 법에서 추방된 자라고 선언했다. 이제 누가 루터를 죽인다 해도 상관없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돌아가던 루터를 위장 납치해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겼다. 루터는 게오르크 기사로 신분을 바꾸어 1년 가까이 숨어 지냈다. 루터는 숨어 지내는 동안 에라스무스의 헬라어판 신약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신학적으로도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다. 루터 번역 이전에 성서는 라틴어로 쓰여 있어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 읽을 수 있었다. 루터의 성서 번역은 현대 표준 독일어가 되었고, 나중에 독일문학을 꽃피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거해 있는 동안 그의 종교개혁 정신은 열정적인 제자들과 추종자들에 의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루터가 1520년에 출판한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로니아 유폐’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루터의 사상을 전파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문이 30절밖에 되지 않는 팸플릿이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은총만으로(sola gratia)!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라고 하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아 ‘자유로운 군주’이지만, 신앙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를 하는, 즉 만물을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제라 주장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담은 소책자들이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90% 정도가 문맹이라 읽을 수 없었다. 그러자 루터의 추종자들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책자를 낭독했다. 그 파급 효과는 신속하고 놀라웠다.

루터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독일은 순식간에 종교개혁의 열기로 타올랐다. 종교개혁의 불길은 엄청 나 루터조차 제어하기 어려웠다. 토마스 뮌처 등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이 생겨났고, 루터 사상을 근거로 농민은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1524년 6월 강제 부역문제로 슈바르츠발트에서 시작된 농민반란은 남부독일을 거쳐 튀링겐, 작센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루터는 처음에 제후들과 농민 사이의 화해를 모색하려 했다. 그러나 농민반란으로 인한 약탈과 폭력은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루터는 제후들 편에 서서 “‘미친 개’를 죽이듯 목졸라 죽이고, 찔러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1525년에 농민전쟁은 약 10만명의 사망자를 내며 진압되었다. 뮌처도 함께 참수되었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카를 황제는 1529년 슈파이어에서 제국의회를 재소집했다. 종교개혁을 중지하고 보름스 칙령을 실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14개 도시와 여섯 제후가 이에 항거했다. 이렇게 항거한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항거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이름이 프로테스탄티즘, 즉 개신교의 이름이 되었다.

농민전쟁 와중에 장가를 갔던 루터는 폰 보라와 행복했을까? 폰 보라는 그 당시 드물게 성공한 여자 CEO였다. 수도원을 개조해 학생들과 손님들의 숙소로 제공했고, 맥주 공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한때 루터 맥주는 선제후의 궁정에 납품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말년의 뚱뚱하고, 볼 살이 붙은 루터의 모습은 아마도 맥주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터는 64세의 나이로 죽었다. 농민반란 진압에 대한 루터의 비판도 있지만,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 필립 멜랑히톤은 이렇게 그를 기렸다.

“루터는 구약시대부터 교부들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스승과 예언자 반열에 드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