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영화 한 편 더 찍는 게 꿈, 국내서 또 한번의 회고전 감개무량”… 정창화 감독

입력 2011-09-19 00:06

“항상 아웃사이더로,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줬는데… 국내에서 또 한 차례 회고전이 열리니 감개무량하죠.”

해외진출 한국 영화감독 1호로 꼽히는 정창화(83) 감독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고 있는 자신의 회고전에 참석하기 위해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귀국했다. 회고전에선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을 비롯해 그의 대표작 12편이 상영 중이다. 첫 회고전은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마련됐다.

1953년 ‘최후의 유혹’으로 데뷔한 정 감독은 77년까지 연출자로, 96년까지는 제작자로 한국과 홍콩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로 꼽히는 그가 홍콩에서 만든 첫 작품 ‘천면마녀’(1969)는 홍콩 영화로는 처음으로 유럽에 수출됐다. 맨손 무술영화의 역작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아시아 영화로는 처음으로 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홍콩생활 막바지에 리샤오룽(李小龍)이 ‘감독님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만들었으니 저와 같이하면 무언가 새로운 영화가 나올 것 같다’며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는데 돌연 사망해 안타까웠죠.”

약 10년간 홍콩 굴지의 제작사인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비스트에서 11편을 만들며 작품 대다수를 성공시켰던 정 감독은 78년 국내에 들어왔다. 향수병이 도졌고, 한국에 선진화된 제작 시스템을 도입해야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영화사 ‘화풍흥업’을 설립해 96년까지 29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나 ‘대박’난 영화는 없었다. 사전심의와 검열을 무기 삼은 억압적인 시대에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정 감독은 96년 낯선 타향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LA한국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며 개인재산을 털어 후배 감독들이 만든 한국 영화를 미국에 소개하고 있는 그는 “액션영화 한 편을 더 찍는 게 꿈”이라고 털어놨다. 팔순이 넘은 그는 “저예산으로 빠르고 힘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공부 중”이란다.

라동철 선임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