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정전사태] 한전, 온국민 불편하게 해놓고 비상매뉴얼만 들먹

입력 2011-09-17 00:18


정전대란이 벌어진 지난 15일의 시간대별 전력사용량 추이를 복기해보면 일찌감치 전력난 발생 경고등이 켜졌지만 정부가 이를 간과한 정황이 드러난다.

당일 오전 11시 전력사용량은 6420만㎾을 기록하며 한국전력거래소가 당일 최대사용량으로 예상한 6400만㎾를 초과했다. 오후 2시 사용량은 6626만㎾까지 솟구쳤고, 전력거래소는 1시간 뒤 예고도 없이 지역별 순환정전이라는 극약처방을 단행했다.

결국 단전까지 4시간이라는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정부는 국민들에게 어떠한 경고도 하지 않았 다. 미리 단전 경고를 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피해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란 지적이다.

전력거래소는 예비전력량이 400만㎾ 밑으로 떨어지는 비상사태가 벌어지자 비상 발전기 가동, 전압 하향조절 등 모든 조치를 취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만 오전부터 시작된 전력불안 조짐을 간과한 책임이 크다.

설령 갑자기 단전 조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국민들에게 최대한 빨리 알리는 일을 게을리 했다. 순환 정전을 실행한 시간은 오후 3시11분이었지만 피해자들의 제보와 언론의 확인 요청으로 전력거래소가 순환 정전 사실을 공개 확인한 시간은 1시간46분 뒤인 오후 4시57분이었다. 한전 관계자는 “전기공급약관상 전력 수급 비상 같은 긴급 상황에서 정전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아도 된다”고 책임을 회피했다.

전력거래소가 당일 기온 판단을 잘못해 단전 사태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있다. 기상청이 15일 최고기온 예상치를 올려 통보했지만, 전력거래소는 이전의 낮은 기온 예보를 근거로 세운 전력수급 계획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전 결정 과정도 논란거리다. 전력거래소 중앙급전소장은 예비전력량 감소에 따른 경보 발령 요건이 발생하면 지경부 장관 등에 보고한 뒤 경보를 발령해야 한다. 그러나 단전은 ‘선(先) 조치, 후(後) 보고’로 이뤄졌다. 더욱이 전력거래소는 단전 조치 보고를 지경부 담당 과장에게만 했고, 보고 시간도 지경부 주장과 엇갈린다.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에도 사전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전력시장운영규칙상 신속한 대응이 필요할 경우에는 경보발령 후 보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국 지역별로 돌아가며 30분씩 전력공급을 중단했어야 할 만큼 당시 전력수급 상황이 최악이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전력거래소의 ‘전력시장운영규칙’에 따르면 지역·광역 단위의 단전이 이뤄지려면 예비전력량이 100만㎾ 아래로 떨어지는 ‘심각(Red)’ 경보가 발령돼야 한다. 그러나 전날 예비전력량 최저치는 오후 3시쯤 148만9000㎾로 대규모 정전 조치를 취하기엔 49만㎾ 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이에 대해 염명천 전력거래소 이사장은 16일 긴급브리핑에서 “광역 단위의 정전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제대응”이라고 설명했다. 50만㎾ 정도의 전력사용은 수초 내에 이뤄지기 때문에 예비전력이 100만㎾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전력시장운영규칙도 ‘(단전 등) 경보 요건 발생이 예상될 때 관련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는 설명이다.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김영환(민주당) 위원장도 “전날 예비전력은 정부 발표치인 148만9000㎾보다 훨씬 적은 31만4000㎾에 불과했다”며 “전국 동시 정전이 발생하는 블랙아웃을 막기 위해 전력거래소가 적절히 행동했다”고 옹호했다.

김정현 최승욱 태원준 기자 k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