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듯말듯 詩語의 재구성 뻔한 일상이 유쾌해지다… 두 여성 시인의 가을 시집
입력 2011-09-16 18:48
이 수명(46) 시인은 얼마 전 낸 시론집 ‘횡단’에서 “시란 내가 최초가 되어 최초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자신의 시론을 정리한 적이 있다. 경험이나 추억 등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자신이 최초가 되어 최초의 사물을 바라보는 풍경은 그러므로 낯설 수밖에 없다. 그는 왜 경험과 추억의 익숙함을 물리치고 최초의 시선을 고집하는 것일까.
“한 마리의 새 뒤에 수백 마리의 새들이 있다. 수백 마리의 새들을 뚫고 나는 나아간다. 그들을 침범하지 않는다. 새들이 들끓고 있다.// 나를 옮긴다. 돌을 옮긴다. 새들이 돌 속으로 들어가고 돌을 빠져 나간다. 새의 반대 방향으로 돌을 옮긴다. 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새를 전개하다’ 전문)
최근 출간된 그의 다섯 번째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문학과지성사)의 서시 격에 해당하는 이 시에 해답이 있을 터이다. 이 시에서 ‘나’는 나를 수백 마리 새들의 세계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이때 하나의 조건은 새들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나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돌을 옮기는데 새들은 전혀 방해받지 않고 돌 속을 통과하고 있다”라는 결론은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나=돌’이라는 등식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새들을 방해하지 않고 새들을 통과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이수명은 시를 뭘 어쩌자고 쓰는 것도,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그는 시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관습을 부정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그런 관습을 혼란시킨다.
“창을 바라본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이것이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누군가의 생각 속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한다. 나는 그의 생각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창이 비추고 있는 것’ 일부)
이 시를 서술형 문장으로 바꾸면 “창이 비추고 있는 것이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하고 나는 그의 생각을 열고 나갈 수 없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술은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여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이수명의 시를 대할 때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이 ‘불편함’과 ‘낯섦’은 그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기인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에 따르면 그 방식은 인접성의 규율을 조직적으로 교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어, 목적어, 서술어 등의 문장 성분들을 재조합하고 있다는 것. 이번 시집에서 시간과 공간이 각각 이상하게 비틀려 있고, 여러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부분)
이러한 언어 선택과 조합의 분란은 독자들을 당황시키지만 이 난해성이야말로 이수명 시의 매력이다.
“올 해로 마음 다섯이 되었습니다. 제게 있어 시는 다섯 개의 마음 중에 몇 번째 마음인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성미정(44) 시인이 네 번 째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문학동네)를 내며 털어놓는 속내다. 마흔 다섯이 아니라 마음 다섯이라는 말에 그가 즐기는 언어 조합에 대한 편력 같은 게 묻어난다. 언어조합 말고도 성미정의 솜씨는 슬픔을 눈물이 아니라 일종의 농담이나 펀(fun)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예컨대 그는 영화배우 김혜수와 유해진의 열애설을 빗댄 시에서 새벽에 잠이 깨 뒤척이다가 영화 ‘타짜’의 화투짝을 떠올리는 동시에 생활의 화투짝만을 돌리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이렇게 눙치면서 넘어간다.
“김혜수와 나 사이의 공통분모라곤/ 김혜수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신혼 초 살던 강남 언덕배기 모 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는 것/ 같은 사십대라는 것 그리고/ 누구누구처럼 이대 나온 여자/ 가 아니라는 것 정도지만(중략)// 오늘 새벽은 김혜수지만 내일은 김혜자/ 내일모레는 김혜순이 될 수도 있는/ 이 쟁쟁한 타자들은 알량한 패만/ 들고 있는 나와는 외사돈의 팔촌도 아니지만/ 그들의 행복이 촌수만큼이나 아득한 길을/ 돌고 돌아 어느 세월에 내게도 연결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김혜수의 행복을 비는 타자의 새벽’ 부분)
생활에 시달리는 상황에서조차 시인은 짐짓 딴청을 부리듯 농을 치는 것이다. 더 쓸쓸해지지 않도록, 더 절망하지 않도록.
성미정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네 살 연하의 시인인 남편 배용태씨와 함께 운영하는 장난감 가게의 이름은 ‘마이 페이버릿(My favorite)’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간다는 인생의 좌표가 확 느껴지는 이름이다. 남편은 일찌감치 시를 접고 생업 쪽으로 기울었지만 그는 자신의 유일한 위안처인 시를 놓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신용대출을 해줄 수 없다는 은행에서/ 우리가 제법 돈푼깨나 갖다바치는 가맹점이라고/ 슬쩍 흘려봐도 요지부동인 은행에서// 고객만족서비스 행사중이라며 건네준/ 휴대용 치약과 칫솔 세트// 그래,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이거지// 은행 앞 은행나무는 참 오래도 살았다지/ 은행을 가진 자본가처럼 말이야// 우리의 장남감 가게는 그들의 노회한 눈에는 애들 장난처럼 비치겠지// 가을이면 은행나무가 유난히 구린내를 풍기는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듯도 싶어”(‘늙가을, 은행 앞에서’ 부분)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시와 생활의 고통은 늘 엇박자를 이루고 있지만 시인은 절대로 시를 포기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 쪽에도 쓸모없는 시를 긁적거리며/ 살아가는 주제로 고통은 늘 새롭고/ 시는 항상 진부하나니// 시인과 고통은 항상 그렇게 엇박자의 코미디 콤비// 웃자마자 눈물이 맺혀도/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시인과 고통은 오늘도 한 편/ 건졌으리니/ 건졌으려나”(‘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부분)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