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이소선 여사에 훈장 추서가 어렵다니
입력 2011-09-15 17:54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은 많은 인생을 바꿔놓았다.
당시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장기표(현 녹색사민당 창당 주비위 대표)는 곧바로 명동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한 달 전 자신이 발행하던 지하신문에 평화시장 노동 문제를 다뤘던 그는 생전 전태일과 일면식도 없었지만 죽음 이후 친구가 됐다. 법대의 장기표 조영래(인권변호사·1990년 작고), 상대의 김근태(민주당 상임고문) 등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인사들은 젊은 노동자의 장례를 학생장으로 치렀다. 장기표는 이후 수배를 받는 와중에도 거의 매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나 청계노조 일을 도왔다. 그의 삶은 재야운동으로 이어졌다.
전태일의 삶 대신 산 어머니
이 여사가 빈소에서 장기표의 손을 잡고 털어놓은 아들의 이야기는 조영래에게 전해졌다. 그는 73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수배생활을 하며 전태일 평전을 써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이던 손학규(민주당 대표)는 탄광노동자를 거쳐 청계천에서 빈민운동을 했다. 상대 1학년이던 김문수(경기도지사)도 등사기로 찍은 전태일 수기를 읽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이소선 여사의 삶도 바꿨다. 판잣집에서 4남매의 생계를 꾸려가던 평범한 어머니는 아들을 떠나보낸 뒤 억척같이 아들의 삶을 대신 살았다. 청계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야학을 운영했으며, 노동현장을 찾았다. 그녀의 새로운 삶은 노동 문제를 꺼내면 ‘빨갱이’ 취급을 받던 시절에 전태일 분신의 의미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거액을 내밀며 빨리 장례를 치르라고 회유하는 공안 당국에 “검은 치마폭에 싸서 뒷산에 묻더라도 내 아들 장례는 내가 치르겠다”며 청계노조 설립 등의 요구를 관철시킨 일이나 민청학련 사건 재판정에서 “노동자에게 노동3권 가르치는 게 죄냐”며 재판부에 삿대질을 했던 일화 등은 그녀의 변화를 웅변해준다.
이소선 여사가 지난 3일 세상을 떠났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훈장 추서를 건의했으나 정부가 기각했다. 개인 업적보다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서 의미가 더 커서 다른 사람과 업적을 비교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소선이 없었다면 전태일이란 밀알의 이삭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정부 판단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여사의 생애는 전태일의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왜 그걸 굳이 분리해서 평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여사에게 훈장을 추서하는 일은 아직 정부 포상을 받은 적이 없는 전태일 열사에게 훈장을 주는 것과 같다. 70·80년대를 살던 인물과 우리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한 모자의 영전에 훈장을 올리는데 왜 그리 인색해야 하는가. 이 여사의 죽음은 전태일의 분신이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는 전환점이다. 진보, 보수를 따질 게 아니라 보다 폭넓은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매듭을 지을 사안이다.
통합 차원 유연한 판단 필요
40여년의 세월 동안 노동운동의 양상은 많이 바뀌었다. 시대도 변했다. 전태일을 따랐던 인사들 가운데 다른 길을 걷는 인물도 있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정부로서 부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을 떠나보내면서 작은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것은 졸렬하다. 대통령은 물론 보수 여당 대표도 조화를 보냈는데, 정부라면 국민 통합이라는 차원에서 더 유연하게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