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울고 웃기는 ‘가격의 마술’
입력 2011-09-15 17:45
가격은 없다/윌리엄 파운드스톤/동녘사이언스
2.60달러짜리 프리미엄 맥주와 1.80달러짜리 할인 맥주가 있다고 해보자. 소비자의 3분의 2는 0.8달러 비싼 프리미엄 맥주를 고른다. 1.60달러짜리 저가 맥주가 등장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할인 맥주를 집는 소비자는 33%에서 47%로 증가한다. 저가 대신 3.40달러짜리 슈퍼 프리미엄 맥주가 추가되면 결과는 반대가 된다. 프리미엄 맥주의 선택 비율이 90%로 높아진다. 프리미엄 맥주를 팔고 싶다면? 이제 답이 분명해진다. 더 비싼 고급 맥주를 출시하면 된다.
미국인의 필수품 스키피 땅콩 버터의 용량 대비 가격이 비싸졌을 때, 소비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평평하던 용기바닥을 움푹 들어가게 바꾼 뒤 용량을 줄이고 가격을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티슈 제조업자는 티슈 한 장의 크기를 줄이고 박스 크기는 그대로 두는 방법으로 재료비를 아꼈다. 물론 가격이 그대로여서 소비자들은 몰랐다. 빈 공간은 공기로 채웠다. 용기와 가격에는 민감하지만 용량 차이에는 둔감한 인간 인지능력의 한계를 이용한 것이다. 소비자 눈에는 꼼수지만, 업계에서는 통용되는 마케팅기법이다.
마트 진열대에서 어떤 맥주와 땅콩버터를 선택하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돈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원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 가격이 원가와 수요·공급에 의해 조정된다는 통념. 책은 이게 미망이라고 단언한다.
현실에서 가격은 아무런 논리적 기초가 없는 무작위와 우연의 산물이다. 똑똑한 줄 알았던 소비자들도 마케터들이 만든 설정 위에서, 그들의 예측에 따라 지갑을 여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소비자를 조종하는 건 정신물리학자와 행동심리학자, 마케팅 전문가, 컨설턴트들. 비법은 인간심리를 이용하는 ‘가격공학’이다.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위블로는 왜 100만달러(약11억원)짜리 블랙 캐비어 빅뱅 시계를 만들었을까. 에르메스가 ‘322개의 검정 다이아몬드를 박은 33만달러(약3억7000만원)짜리’ 한정판 시계를 출시한 이유는? 모두 대비효과 때문이다. 8만2000달러(약9000만원)짜리 위블로 클래식은 분명 손목에 차는 시계 한 개의 가격으로는 비합리적으로 비싸다. 하지만 위블로 매장에 전시된 100만달러짜리 시계를 보고 난 뒤라면 생각은 달라진다. 소비자는 1억원도 안되는 돈으로 위블로 시계를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할지 모른다.
식당 메뉴에도 꼼수는 있다.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 세트 메뉴는 햄버거와 소다를 단품으로 살 때보다 조금 비싼 가격에 감자튀김을 얹어준다. 소비자는 감자튀김을 싸게 얻었다고 기뻐하지만, 실제 구매자의 상당수는 애초 감자튀김이 필요 없는 고객들이다. 레스토랑의 복잡한 코스 메뉴와 세트 할인에 머리가 어지러웠던 경험이 있는 당신. 특별히 수학이 약해 겪은 혼란이 아니었다. 원하는 요리를 도대체 얼마에 구매했는지 헷갈리게 만드는 건 레스토랑 메뉴 세팅의 원칙이다.
저자는 가격공학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반대로 생각하기, 친구 데려가기 같은 방법을 제안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소비자가 멍청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우리들이다. 최정규, 하승아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