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VS 레드 … 라면, 色을 먹다

입력 2011-09-15 18:16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주부 신영희(38)씨는 지난달 중순 동네 근처의 한 편의점에 들러 ‘꼬꼬면’을 찾았다. 평소 라면을 즐기지 않는 그였지만 이 신제품이 맛있다는 입소문을 듣고 대형마트를 찾았다가 품절됐다는 얘기를 듣고 할 수 없이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씨는 진열대에서 다섯 개 들이 한 묶음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그러나 점원은 공급량이 모자란다며 묶음이 아닌 낱개로 살 것을 요구했다. 신씨는 황당했지만 결국 2개만 집었다. 라면 사러 갔다가 낱개 구입을 요구받은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최근 개점한 경기도의 한 대형마트는 지난 3일 하루에만 ‘꼬꼬면’ 290박스(약 1만개·900만원어치)를 팔아치웠다. 290박스는 이 라면 제조회사가 설립된 1969년 이래 단일 지점에서 기록한 하루 최고의 판매량이다. 회사 관계자는 “물량을 추가로 공급할 수만 있었다면 판매량이 훨씬 늘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판매량 1위를 달리는 경쟁업체의 라면은 같은 날 불과 60박스(약 900개·60만원어치)만 팔려 대조를 이뤘다.

라면 시장에 한국야쿠르트가 내놓은 꼬꼬면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3월 KBS 2TV ‘남자의 자격’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이경규씨가 조리 비법을 소개했던 사제(私製) 라면이 5개월 뒤인 8월 정식 제품으로 출시되자마자 일어난 현상이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꼬꼬면에 비유하기도 했다. 라면 시장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붉은 색 국물 일색 보수적 라면 시장

인스턴트 라면이 한국에 출현한 것은 1963년 9월 15일.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삼양식품의 창업주인 전중윤 사장은 당시 국교도 없던 일본으로부터 라면생산 설비를 도입해 일본식 라면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지금까지 라면은 온 국민이 즐기는 음식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대한민국 인구 5000만명 중 4000만명이 1년에 한 차례 이상 라면을 먹었다는 통계도 있다. 대통령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재직 시절부터 직접 라면을 끓여먹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라면에 계란을 두 개씩 풀어야 만족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위해 탄 공군 1호기에서조차 권양숙 여사와 함께 라면을 즐겼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나고 제품 자체도 다양하게 진화했지만 라면 소비층의 입맛은 매우 보수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우선, 한번 라면 맛에 길들여지면 좀처럼 다른 브랜드의 라면을 먹지 않는다. 실제로 삼양라면(1963년)과 너구리(1982년), 안성탕면(1983년), 신라면(1986년) 등은 모두 생산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제품들이다. 업계 조사에 따르면 2008년 1월부터 올 5월까지 브랜드 별로 가장 많이 팔린 라면 1∼50위에서 신라면(1위), 안성탕면(2위), 삼양라면(3위), 너구리(5위) 등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둘째로 인기 있는 라면 대부분이 붉은 색 계열의 국물 일색이라는 점이다. 위 통계에서 1∼10위 라면 중 국물이 붉은 색이 아닌 것은 짜파게티(4위)밖에 없다. 국내 라면 소비자는 대체로 붉은 색 국물만 찾는 보수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류로 등극하는 흰색 국물

그런데 꼬꼬면 출시를 계기로 라면 소비추세에 상당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달 2일 출시된 이 라면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광고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인기몰이가 대단하다. 한 달여 만에 1100만개가 팔려 80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린 것이다. 한국야쿠르트가 여름 주력상품으로 밀어 온 비빔면의 월 최대 수요가 1000만개다. 비빔면이 계절 상품이고 꼬꼬면이 4계절 상품인 점을 감안하면 출시되자마자 회사의 주력상품으로 벌떡 일어선 셈이다. 회사 측은 당초 꼬꼬면의 수요를 월 200만∼300만개로 예측했다. 최용민 한국야쿠르트 F&B마케팅팀 차장은 “현재 유통업체와 소비자의 요구량이 월 1500만개에 달한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무게 120g, 길이 46∼50m의 통상적인 국수 가닥으로 이뤄진 이 라면이 각광 받는 이유로 소비자의 변화 욕구를 읽었다는 점을 꼽는다. 기존 라면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소고기 국물에 맵고 짠 맛이었던 데 비해 꼬꼬면 국물은 담백한 닭고기 육수를 바탕으로 해 새로운 것을 원하던 소비자의 호기심과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또 제품 생산 과정에서 소비자와 쌍방향 소통을 한 것도 인기의 원인이 됐다. 일반적인 라면 개발은 경쟁사 등을 의식해 비밀리에 추진된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상당부분 제조법이 알려져 보안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개발 과정에서부터 공개 시식단 등 소비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형식으로 발상을 전환해 맞춤형 라면을 만들 수 있었다. 최 차장은 “제품 개발과정을 모두 회사 블로그에 공개해 소비자가 어떻게 라면이 생산되는지 알고 있었다”라며 “시식 과정까지 거쳐 제품 상품화 전에 입소문이 먼저 난 것이 인기를 끌게 된 비결 같다”고 말했다.

이경규씨가 개발 및 생산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도 소비자의 관심을 끄는 부수적 요인이 됐다. 이씨는 라면 공장가격의 1%대를 로열티로 10년간 받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라면 블랙, 물가상승 주범?

라면 시장 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1조8000억원대로 추정된다. 이 중 압도적 1위인 농심이 1조3000억원으로 70%가 넘고, 삼양식품(2200억원)과 오뚜기(1700억원), 한국야쿠르트(1600억원)가 나머지를 분할하고 있다. 농심의 지위는 절대적이어서 주력상품인 신라면의 경우 매출이 3500억원에 달해 다른 회사 전체 매출을 능가할 정도다.

하지만 꼬꼬면 인기가 수직상승하면서 업계 순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한국야쿠르트 측은 지금과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연말까지 4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려 오뚜기를 추월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경기 이천의 공장에 지난 5월부터 300억원을 투자, 설비를 증설했으며 하루 생산량도 종전 20만개에서 9월 들어 50만개로 대폭 늘렸다.

이와는 정반대로 농심은 무려 3년간 공을 들여 지난 4월 야심 차게 출시한 ‘신라면 블랙’이 허위과장광고에 물가상승의 주범으로 내몰리면서 4개월 만에 생산을 중단하는 참담함을 맛봤다. 한국야쿠르트가 꼬꼬면의 대박으로 휘파람을 불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비교가 됐다. 업계 1위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패인이 뭘까.

신라면 블랙은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을 담았다’ ‘완전식품에 가깝다’ 등의 개념을 내세우며 기존 라면보다 2배가량 비싼 개당 1600원을 책정했지만 지나치게 비싸다는 소비자들 눈총을 극복하지 못했다. 높은 가격을 상쇄할 만한 맛이나 영양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6월 공정거래위원회가 허위·과장 광고에 해당된다며 1억5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바람에 치명상을 입었다.

업계에서는 경쟁 제품이기는 하지만 신라면 블랙의 급속한 몰락에 동정어린 시선도 보내고 있다. 밀가루를 비롯한 원자재 값의 상승 등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고려해볼 때 정부가 유독 라면에 집중해 가격 인상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실제로 라면은 역대 정권에서 늘 가격을 마음대로 올릴 수 없도록 집중 관리되는 품목 중 하나였다. 이 대통령의 경우 2008년 2월 27일 대통령 취임 직후 소집된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라면 값이 100원 올랐다. 라면 많이 먹는 서민에게 100원은 크다”며 “청와대는 초점을 서민에게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100원 인상을 대통령이 직접 거론할 만큼 정권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얘기다. 현 정부에서 라면은 52개 ‘MB 물가지수’ 품목에 포함돼 철저한 가격 통제를 받고 있다. 그러니 개당 1600원짜리 라면의 등장이 당국에 어떻게 비쳐졌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라면 블랙이 시장에서 퇴출된 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 정부의 심기를 건드린 게 주원인이라는 분석이 그래서 나온다.

꼬꼬면, 기쁨의 울음소리 아직 이르다

꼬꼬면이 초반 성공을 거두고는 있지만 지금과 같은 판매 추세가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신라면 블랙의 실패에서 보듯 예상치 못한 변수가 제품의 성공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소비자들 입맛은 변덕이 심하다. 신제품에 대한 호기심의 거품이 사라지고 나면 금세 등을 돌리고 기존의 익숙한 라면 국물을 다시 찾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요컨대 꼬꼬면이 시장에서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는지 여부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야쿠르트 관계자들도 꼬꼬면의 장래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라면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시점으로 보통 출시 이후 3개월을 본다. 일반 소비자가 일주일에 한 번 라면을 먹는다고 가정할 때 같은 브랜드의 라면을 다시 구입하는 주기가 3개월이라는 것이다. 즉 꼬꼬면의 경우 11월까지는 판매 추세를 더 봐야 하고 외부 변수가 있을지도 살펴야 한다.

한국야쿠르트 측은 “광고를 포함한 본격적인 마케팅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초반 수요가 기대 이상 많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다음 번 구매 주기 때 소비자가 어떤 구매 성향을 보일지는 아직 예측하기 힘들다”고 조심스러워했다.

글=이제훈 기자 사진=구성찬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