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참, 반대했는데 허∼참, 볼수록 좋네… 서울 문래동 철공소 옥상 도심텃밭 프로젝트 성공기

입력 2011-09-15 18:01


그들은 도통 말이 없었다.

지난 7일 낮 12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제단지. “끼익 끼익 캉 캉 치직 치직.” 쇳덩이를 갈고, 두드리고, 붙이는 소리. 소음이 귀를 찌를수록 사내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스테인리스 쟁반을 머리에 이고 밥을 나르는 여인도, 고철을 지게에 싣고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는 할아버지도, 파리채 휘두르는 식당 주인도, 허름한 기사식당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택시기사도 모두 말이 없었다.

초행길이라 이리저리 헤매던 내가 똑같은 길을 세 번 오가는 것을 목격한 한 철공소 아저씨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방 어딜 찾는 거여? 모르면 모른다, 뭘 물어봐야지이!” 모두가 돌아봤다. 목적지를 말한 뒤 방해될까봐 물어보지 않았다고 해명하려는데 남자가 손가락으로 특정 건물을 찌르듯 가리켰다.

불친절한 사람들. 투덜대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래동 54의 41. 1층엔 철공소, 2층엔 당구장, 3층엔 퀵서비스 사무실이 있는 건물이다. 누군가 건물 입구에 로봇을 그려 넣고, 계단에는 사람을 페인트로 그려 놨다. 문래동에서 활동하는 한 미술가의 ‘작품’이다. 지나오는 길에도 크고 작은 페인트 벽화와 철제 조형물이 여럿 눈에 띄었다. 계단을 밟아 오르는 순간, 곰팡내와 화장실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옥상까지 숨을 참고 올라갔다. 옥상엔 텃밭이 있다고 했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해 참았던 숨을 가득 들이마시는 데 다시 지린내가 올라왔다. 해도 너무하다.

텃밭 물주기 당번을 맡고 있던 미술작가 이소주(37)씨에게 푸념을 늘어놨다. 그러나 이 작가에게서 돌아온 답변. “그럼 가요.” 냄새가 싫으면 그냥 집에 가라고? 문래동의 첫인상은 팍팍했다.

오해

모든 게 오해였다. 나도, 예술가도 철공소 사장님도, 아파트 주민끼리도 처음엔 서로를 오해했던 것이다.

철공소 아저씨가 소리를 버럭 지른 이유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기계음에 말소리가 묻히기 때문이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은 건 내 목소리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텃밭에서 맡은 지린내는 유기농 비료로 오줌을 쓰기 때문이었다. 이 작가가 말한 “그럼 가요”는 진짜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문래동은 ‘그런’ 동네가 아니라는 뜻에서 던진 ‘유머’였다.

문래동은 오해 때문에 말이 많은 동네라고 했다. 맞담배 일화. 젊은 예술가와 철공소 사장님들이 ‘S상회’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젊은 예술가가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철공소 사장님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이 일로 철공소 사장님은 예술 하는 친구들이 ‘싸가지 없다’는 편견을 갖게 됐고, 다른 철공소 사장님에게서 주의 경고를 받은 예술가는 철공소 사장님을 어려워하게 됐다.

문래동 철공소 종사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은 주로 1970년대 청운의 꿈을 안고 문래동에 모여든 도시 공업화의 산증인들이다. ‘가방끈’이 짧지만 한때는 대학을 졸업한 샐러리맨보다 월급이 많았다. 88올림픽 때는 그야말로 전성시대였다. 조금만 더 애쓰면 번듯한 내 가게도 열고, 내 집도 마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90년대 중후반부터 외환위기, 중국산 철제 수입품 공세, 정부의 도심 정비사업 추진 등에 따라 문래동 경기는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았다. 건물주는 언젠가 철거될 지역이라며 건물을 방치했고, 세입자들은 속속 경기도 시흥, 안양 등 수도권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각종 첨단기계의 등장은 일자리를 위협했다. 특히 컴퓨터수치제어공작기계(CNC)는 수공업 기술자들의 일감을 뺏어가는 ‘주범’이었다. 청춘을 바쳐 달려왔지만 꿈은 아직도 저 멀리 있다. 그래도 자부심만큼은 대단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문래동 예술가들은 어떤 이들인가. 2000년 초부터 임대료가 싸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들면서 일종의 예술촌을 형성한 그들은 대체로 가난하다. 문래동에선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5만원이면 작업실(14평 기준)을 얻을 수 있다. 저비용만 고려해서 문래동에 정착한 건 아니다. 낮에는 시끄럽고 밤에는 적막한 준공업지 특유의 환경. 예술가에겐 최적지다. 음악가, 설치미술가, 공연단은 문래동의 낮을 사랑했고, 시나리오 작가, 만화가, 기획자들은 문래동의 밤에 빠졌다. 방치된 건물은 미술가들을 열광시켰다. 들어가서 멋대로 조형물을 달고,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고, 낙서를 해도 눈감아주는 곳은 드물다.

‘문래도심텃밭’의 탄생

외지인들은 예술가들이 온 뒤로 문래동이 달라졌다며 주말마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화가들은 온 동네에 벽화를 그렸고, 음악가와 무용가들은 가끔 공터에서 야외공연도 펼쳤으니 겉으로 보이는 문래동은 확실히 달라졌다.

그러나 철공소 사장님들은 노동의 현장이 ‘노는 공간’으로 바뀌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예술가 그룹은 그들대로 답답한 사정이 있었다. 그 무렵 ‘텃밭’이 생겼다.

지난 2월 김정헌(65)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이소주 작가에게 “텃밭 하나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옥상미술관 프로젝트(옥상예술활동)’ 참여 경험이 있는 이씨는 “좋죠”라고 답했다. 사단법인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는 김 전 위원장에게 텃밭은 ‘커뮤니티’였고, 이씨에게 텃밭은 ‘공공미술프로젝트’였다.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 건물(문래3동 54의 22) 옥상에 텃밭을 만들기로 했다. 건물주는 안전 문제 등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임대료를 낼 것도 아닌데 복덕방을 거칠 수도 없는 노릇. 김 위원장은 김덕진(43·세현정밀) 사장을 찾아갔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몇 안되는 철공소 사장님이다. 김 사장은 장소 물색을 도와주겠노라 답했다. 전남 나주에서 열아홉 살까지 농사짓다 문래동 철공소에 취직했던 김 사장에게 텃밭은 ‘노스탤지어’였다.

그러나 건물주들은 옥상을 내주지 않았다. 철공소 옥상은 사실 쓰레기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만 잡동사니가 방치된 장소. 그곳을 깨끗하게 치우고 텃밭을 만들어주겠다는데 건물주는 거부했다. 안전과 관리 문제를 이유로 들었지만 속내는 이랬다. ‘재개발이라도 추진돼 봐. 텃밭이 괜한 문제를 일으킬지 몰라.’

계획이 물거품이 되려는 순간, 영동스텐레스 철공소 건물주가 구원투수로 나타났다. 동네에서 ‘회장님’으로 통하는 그는 자신도 양수리에서 고추 농사짓고 있다며 옥상을 내줬다. 옥상 텃밭에 관한 이야기는 여성환경연대 이보은(43) 대안생활위원장 귀에도 들어갔다. 여성환경연대 사무실(영등포동)에서 지척인 문래동을 오래전부터 지켜봐왔던 그녀. 잿빛 철제단지에 새싹이 움튼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그럴 듯했다. 그 길로 텃밭 후원 유치에 들어간 이 위원장에게 텃밭은 도시생활의 ‘대안’이었다.

이름 하여 ‘문래도심텃밭’이 철공소 옥상 위에 펼쳐진 건 5월 5일 어린이날. 그날 마을 예술가들과 철공소 아저씨들은 인근 아파트 주민과 다른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늦은 밤까지 옥상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변화는 그때부터였다.

옥상 텃밭을 가꾸며 싹튼 ‘관계’

철공소 사장님들이 먼저 관심을 보였다. “저게 뭐여, 어린애들 장난하는 것이지. 나가 농사라믄 작금도 눈 감고도 한당께.” 이렇게 말한 사장님의 철공소 앞엔 ‘문래도심텃밭’ 상자가 놓여 있었다. 신청을 해서 분양받은 상자로, 그 안에선 토란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청양고추지 뭐여. 그냥 심심풀이, 눈요기. 물은 수시로 주지.” 영동스텐레스 직원 김모(57)씨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지만, 분양받은 상자 속 고추는 정성껏 기른 흔적이 역력했다. 어떤 사장님은 철가루 먹고 자란 채소를 사람이 먹어도 되냐며 검사부터 받아 달라고 요청했다(6월에 민간 시험기관 랩프론티어가 실시한 중금속 검사 무사통과).

텃밭에선 격주 토요일마다 농사 워크숍이 열린다. 김덕진 사장의 출석률은 100%다. 이전에는 토요일마다 일찌감치 가게 문을 닫고 부천 역곡 자택으로 향했던 김 사장은 이제 워크숍이 열리는 날 늦도록 가게 문을 열어둔다. “그냥 사람 만나는 게 좋아 가는 거지.”

워크숍에 참여하는 철공소 아저씨는 한두 명뿐이다. 하지만 텃밭 채소 상자를 분양받아 가게 앞에서 키우는 아저씨들은 제법 늘었다. 지난 7일에도 철공소 사장님 8명이 텃밭 상자를 분양받아 갔다.

예술가들도 흥미를 보인다. 독일인 미술가 카트린, 조각가 정동훈, 애니메이션 감독 박소영, 회화 작가 이미미, 회화 작가 이승필···. 텃밭에 참여하는 예술가 리스트다. 이파리만 보고 어떤 채소인지 맞히기 시작한 그들은 텃밭 흙에 토마토, 호박, 브로콜리 그림을 그린 작은 표식을 꽂아뒀다.

텃밭의 채소가 무성해질수록 참여자는 늘었다. 철제단지라면 손사래를 치던 인근 아파트 주민들도 하나둘 합류했다. 지난해 기업은행에서 은퇴한 최영식(58)씨, 플로리스트 출신 한명주(35) 주부, 일곱 살 딸을 둔 이선미(37) 주부는 호기심에 옥상 텃밭에 한번 올라갔다 결국 ‘정회원’이 됐다. 주부들에게 텃밭은 ‘무제한 리필 야채 가게’이자 ‘자녀 생태 교육장’이었고, 은퇴자 최씨에겐 인생 제2막의 방향을 알려준 ‘이정표’였다.

아파트에서 온 아이의 명랑한 목소리, 손맛이 일품인 주부의 부추전에 무뚝뚝한 철공소 아저씨들도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그전까지는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문래동이라 할 정도로 아파트 주민들과 철제단지 사람들 사이에 왕래가 없었다.

현재 텃밭 일에 참여하는 인원은 20여명. 비전문가들이지만 ‘나는 농부다’라며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박사, 일본인 텃밭 전문가 등이 특강을 왔을 정도로 학구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그중 지난 5월 문래동에 이사 온 박건태(27)씨는 지렁이 수만 마리를 기르는 일명 ‘지렁이 총각’이다. 경기도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1000만원 예비창업자금을 지원받아 ‘지렁이 분변토’ 사업을 시작한 그는 텃밭에서 유기농법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멀리 경기 군포와 서울 안암동에서 왔다는 대학생 손민정(23), 서지원(23)씨는 이곳에서 생태 활동가, 혹은 농부의 꿈을 키워간다고 했다. 텃밭 채소를 사가는 레스토랑 사장님도 나타났다. 홍대 산울림극장 1층 ‘수카라’ 레스토랑의 김수향(37·여)씨는 한 달에 두 번 텃밭을 찾아와 채소를 2.5㎏씩(100g 당 500원) 실어가고 있다. 샐러드용이란다.

정작 텃밭 아이디어를 내고 촌장으로 이름을 올렸던 김정헌 전 위원장은 충북 제천의 폐교로 내려갔지만, 그의 바람대로 일단 ‘커뮤니티’는 만들어졌다. 원활한 소통까진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동네를 몇 바퀴 돌다 쉴 곳이 없어 다시 옥상 텃밭에 올라갔다.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철제단지를 둘러싼 초고층 건물이 유독 휘황찬란해 보였다. 철제 상가들은 참 낡았다. 언젠간 이곳에도 고층 건물이 들어서겠지.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오늘도 문래동 사람들은 물을 주고 푸성귀를 딴다.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