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종석 (8) 700여 찬양대원과 美 카네기홀서 감동 무대

입력 2011-09-15 17:52


나는 1987년 6월 선거를 통해 장로가 됐다. 그 후 기회 될 때마다 후배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어떤 장로들이 인간의 눈으로는 부족해 보여도 장로는 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목덜미를 잡혀야 한다.” 대부분 장로들은 나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현교회 시무장로가 된 후에는 기획위원장, 선교위원장, 찬양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었고, 주님께 불순종했던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지경이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봉사했던 곳은 찬양대였다. 2009년 장로 은퇴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찬양대장과 찬양위원장으로 섬겼다.

찬양대장의 역할은 찬양대원과 지휘자, 반주자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나지 않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조화의 힘으로 신령한 찬양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찬양대장을 하면서 느낀 건 찬양대장이 깨어 있지 않거나 시험에 들면 찬양대 전체가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찬양대장의 가장 큰 임무는 기도였던 것이다. 찬양은 설교 전에 하는 전주곡 정도가 아니다. 찬양은 노래로 하는 설교다. 찬양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찬양대가 깨어 있지 못할 때 박자는 잘 맞고, 화음은 아름답게 들릴지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령에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충현교회가 설립된 후 처음으로 찬양위원회에서 연합찬양대를 조직한 일이다. 찬양대원 350명과 오케스트라 대원 50명으로 구성했다. 서울 장안에서 단일 교회 치고는 아마 처음이었지 싶다. 400여명의 대원이 단상에 서서 ‘메시아’ 합창을 부를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연합찬양대장을 내가 맡았었다. 나중엔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충현교회에 가려면 반드시 본당 2층에서 예배를 드려라. 찬양대와 솔리스트가 어우러져 부르는 노래를 눈감고 들으면 그렇게 장엄하고 은혜로울 수 없다.’

매 주일 아침, 찬양대는 총연습을 마무리하고 본당으로 올라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때를 성령이 임하시는 시간으로 보고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예배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찬양대를 맡으면서 나는 내심 다른 장로님들에게 미안했다. 이런 은혜를 다른 장로님들은 경험하지 못하고 나 혼자만 경험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충현교회는 놀라운 시도를 했다. 미국 카네기홀과 무디교회에서 순회 찬양을 계획한 것이다. 우려도 많았지만 도전했고, 결국 길이 열렸다. 700명에 달하는 찬양대를 지휘해 뉴욕의 카네기홀과 무디교회에서 찬양을 불렀다. 무디교회에서는 찬양집회가 끝난 뒤 차를 타고 나이아가라폭포 근처 잔디밭으로 이동해 거기서도 찬양을 불렀다. 주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감동적인 표정으로 찬양을 듣는 모습이 그렇게 감격적일 수 없었다. 순회 찬양을 계기로 찬양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분명한 확신이 자리잡게 됐다.

나는 지금도 예배 시간에 자리에 앉아 찬양대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설렌다. 비록 은퇴장로이고 나이도 들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러면서 음악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부족한 나 같은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찬양대를 섬기도록 맡겨 주셨다는 점이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