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수방랑기(15)-절해야만 효자이던가요
입력 2011-09-15 14:40
청년 예수 방랑기 (15)
절해야만 효자이던가요?
주일 오후였습니다. 나 예수는 의정부에서 주일 오후 설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숙소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교외선 전철이 무척이나 붐볐고 시계 바늘은 5시를 가리켰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봉산 자락에는 석양과 어울려 가을이 농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철 안에는 등산복 차림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가족 그룹도 여럿인데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보아 성묘하고 돌아오는 분들입니다. 오늘이 주일이면서 또 추석명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조금은 큰 소리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50대 초반쯤 될까요, 코가 벌겋고 입에서는 술 냄새가 확 풍겨 나왔습니다.
“아직 젊으신데... ... 혹시 장로이신가요, 아니면 목사이신가요?”
“장로도 되고 목사도 되지만 목자라고 불러 주시면 좋습니다.”
“그거 좀 복잡하군요. 아무튼 예수쟁이들을 가르치시는 분이신 건 틀림없는데... ... 그런데 어째서 예수쟁이들은 제 애비 어미에게 효도할 줄을 전혀 모릅니까?”
그는 따지듯이 일부러 언성을 높였습니다. 모든 승객들이 다 들어보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 예수를 조롱하겠다는 심보였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보시지요? 무슨 사유가 있으실 터인데요.”
“다른 게 아닙니다. 오늘 추석인데 제 아우가 제사 지내러 오지도 않고 부모님 성묘도 안 갔습니다. 예배당으로 뺑소니쳤지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제 몸이 어디서 생겨났는데요?”
“육신의 부모를 섬기는 것보다 그 부모를 주신 하늘 부모님을 섬기는 것을 먼저 하겠다는 거 아닐까요? 혹시 주 중에 성묘하러 따로 가겠다고 하지 않던가요?”
“어쩌면 제 아우의 레코드판이십니까? 바로 그게 못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예배당 가고, 제 새끼들 밥 먹이고, 그리고 시간이 남아야 부모를 돌아보겠다니, 부모를 뭐 쓰레기로 취급해도 되는 겁니까? 이번만이 아닙니다. 추석명절이 일요일 아닌 때에도 제사상 앞에서 뻣뻣이 서 있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것 때문에 분란이 일어난 게 벌써 몇 해째인지 아십니까?”
그의 말을 듣고 나 예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습니다. 그 아우의 바위 같은 믿음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에도 제씨께서 혹시 불순종하는 망나니였던가요? 절한다는 건 존경한다는 뜻도 있지만 순종한다는 뜻이 핵심일 것 같은데요.”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것 같아 솔직히 말씀 드립니다. 부모 속 팍팍 썩인 건 바로 저였지요. 아우는 예배당 가는 것 말고는 부모님께 아주 고분고분하게 순종했습니다. 허지만 끝맺음을 잘 해요 모두 잘한 거지요. ”
전철 안이 아까 이야기를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조용해졌습니다. 승객들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워 우리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습니다.
“제사상과 묘소 앞에서 절하는 것이 형식적 효성이라면 부모님의 모범된 행실을 본받고 특히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울어나는 효성 아닐까요?”
그 말을 듣고 그는 갑자기 엉엉소리를 내며 통곡했습니다. 옆에 앉은 그의 아내가 진정하라니까 울음을 간신히 그치고 이렇게 혼자말을 했습니다.
“실은 제 아우의 전도로 홀모이셨던 어머님도 예수님을 믿고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을 하늘나라 그 좋은 곳에서 영원히 사시도록 안내했던 제 아우가 제일 큰 효도를 했다는 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지만 아우에게는 공연히 심술이 나서 어머님께 물려받은 유산을 한 톨도 주지 않고 제가 다 챙겼지요. 제사상 앞에서 절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제가 죄질이 무척 나쁜 놈입니다. 이제, 술담배 싹 끊고 예수 믿게 해달라고 저를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하시던 어머님 음성이 다시 들려오는군요.”
그는 또다시 흐느껴 울었습니다. 회개의 청순한 눈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