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진영] 추석 단상
입력 2011-09-14 17:47
추석은 역시 달콤했다. 귀성 경부고속도로는 과속을 걱정할 정도로 뻥뻥 뚫렸다. 고향은 부모님과 친구들의 넉넉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여든이 넘은 아버지도 연세에 비해 무탈하셨고, 발을 삐끗해 걸음이 불편한 것 말고는 고희를 훌쩍 넘긴 어머니도 건강하셨다.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과 그 음식에 깃들인 정성은 여전했고, 추억과 향수를 간직한 물건들과 장소는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추석 전날, 친구들과의 점심은 여유롭고 즐거웠다.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운동 후 함께 하는 식사는 신분과 격식, 재력의 빗장을 허물었다. 항상 그랬듯 모이면 먹고, 먹고 나면 정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중년을 지나 장년을 향하는 나이 탓일까, 아니면 자기 분야에서 한가락 한다는 자부심으로 훈수를 두고 싶은 욕구 때문일까. 정치 관심이 유난하다. 서울에서 기자를 하는 내가 뭘 좀 안다고 생각하는지 질문은 항상 내게 몰린다. ‘원조 보수’에다 ‘꼴통’ 기질이 강한 지역 정서 탓에 나도 때로는 조심스럽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폄하는 불편하다. 그러나 이번은 금기의 한계가 한결 느슨해졌음을 느꼈다.
올 추석 정치방담(?)의 중심은 단연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다. ‘그 사람 대단하더먼’으로 시작해 ‘사람이 깨끗하고 신선한 이미지가 좋게 보이더라’ ‘우리 정치도 이젠 스마트해야 되지 않을까’ ‘서울시장감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뭐 해본 게 있나. 대통령감은 아니지’ 등등 각자의 생각을 털어놨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품평도 뒤따랐다. ‘그 사람도 안철수 보고 정신이 번쩍했겠지’ ‘뭐 하는 것도 없고, 안 하는 것도 없고 가만히 폼만 잡아서야 안 되지’ ‘작년 달성군수 선거 보라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박 전 대표가 직접 지원유세를 했음에도 자기 지역구에서 군수 하나 당선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뭘 하겠어’ ‘그래도 박근혜 말고 누구 찍겠어’. 결론은 박근혜는 ‘안정감이 있지만 독선적이고 우유부단하다’, 안철수는 ‘깨끗한 이미지나 국정운영 능력이 의심된다’ 등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그대로였다. 이 같은 보통사람들의 생각은 주요 언론사가 추석 연휴기간 실시한 ‘대권민심’ 여론조사에 그대로 반영됐다. 14일자 보도를 보면 국민일보는 박근혜 49.8% 안철수 40.1%, 조선일보는 박 45.2% 안 41.2%, 서울신문은 박 46.1% 안 44.3%였다.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 대한 친구들의 과도한 반감이었다. 곽 교육감에 대해서는 듣기 심하다 할 정도의 ‘원색적 비난’ 일색이었다. ‘그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무위였다. 자신들과는 무관한 서울 교육감에 관한 일에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알 듯 모를 듯했다.
추석 당일, 귀경을 서둘렀다. 과거 10시간 이상씩 걸리곤 했던 명절의 ‘정체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오전 10시 출발, 대전까지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충청권에 진입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변했다. 교통방송을 듣고 경부에서 중부고속도로로 방향을 틀었으나 허사였다. 라디오에서는 ‘전국 도로 어디를 봐도 괜찮다고 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오늘 중으로 서울에 도착하신다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오십시오’라는 멘트만 되풀이됐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무려 9시간이 걸렸다. 다음 날 출근했더니 동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이처럼 막힌 귀경길이 없었다고 했다.
이제 일상이다. 내게는 대개의 직장인들에 비해 짧은 연휴였지만 명절은 좋았고 고향은 반가웠다. 예상대로 이번 추석은 그 어느 명절보다 정치 민심이 넘쳐났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안철수’를 들먹였고, ‘박근혜’를 얘기했다. 대선 정치일정이 1년도 더 남았음에도 국민들이 이렇게 정치에 열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명절을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정치다. 정치가 제 자리에 설 때 명절은 명절다울 것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정진영 카피리더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