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나무 다리 추억을 가로지르고 일렁이는 여울은 나그네 호사려니… 경북 영주 문수면 무섬마을

입력 2011-09-14 17:25


‘솟구쳐 흐르는 물줄기모양 뻗어 내린 소백산 준령(峻嶺)이 어쩌다 여기서 맥(脈)이 끊기며 마치 범이 꼬리를 사리듯 돌려 맺혔다. 그 맺어진 데서 다시 잔잔한 구릉(丘陵)이 좌우로 퍼진 한복판에 큰 마을이 있으니 세칭 이 골을 김씨 마을이라 한다. 필재의 집은 이 마을의 종가(宗家)요. 그는 종손(宗孫)이다.’

종가제도를 유지하려는 구세대와 이에서 벗어나려는 신세대의 갈등을 그린 정한숙의 단편소설 ‘고가’에 등장하는 김씨 마을은 다름 아닌 무섬마을이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로 불리는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는 추억의 외나무다리가 남아있는 유일한 강마을이다.

무섬마을은 산태극수태극 형상으로 풍수지리적으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뒷산은 태백산 줄기이고 무섬마을을 둘러싼 산줄기는 소백산이다. 태백산 줄기에서 흘러내리는 내성천과 소백산 줄기에서 내려오는 서천이 마을 뒤에서 합류해 오메가형으로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지금은 마을 앞 수도교와 마을 뒤 무섬교가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고 있지만 40년 전만 해도 무섬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큰비라도 내리면 외나무다리가 물에 떠내려가 무섬마을은 고립무원의 섬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농사지을 땅 한 뼘 없는 이곳에 사람들은 왜 들어와 살았을까.

무섬마을의 역사는 1666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반남 박씨가 먼저 터를 개척했고 그 후 신성 김씨가 들어왔다. 마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을주민 중 박씨와 김씨가 아닌 사람은 다른 지역에서 시집 온 여성들뿐이다. 주민들이 모두 일가친척으로 한국전쟁 때는 마을에 좌우익이 공존했지만 격렬한 토론만 하고 밀고는 안 해 한 명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논도 밭도 없는 강마을이 번성한 것은 주민들이 양반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무섬마을을 중심으로 직경 30리가 모두 주민들 소유로 토지가 안동·예천 경계에 솟은 학가산 아래까지 이를 정도로 부촌이었다. 추수가 끝나면 외나무다리를 건너 무섬마을로 곡식을 나르는 소작농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고 한다.

무섬마을 자랑거리는 만죽재와 해우당 등 고색창연한 고택들. 40여 채 가운데 30여 채가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이거나 초가집으로 이 중 9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사랑채, 안채, 대청마루에 널찍한 마당까지 갖춘 고택들은 돌담이 자연스럽게 골목을 이루고 있다. 잘 가꿔진 정원과 텃밭, 그리고 골목에는 형형색색의 가을꽃이 피어 정겨운 고향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반남 박씨 판관공파의 종가인 만죽재. 해우당은 19세기 말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 선생이 지은 집으로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김위진가옥은 평범해 보이지만 수리를 하기 위해 땅을 파자 엽전이 1톤 트럭으로 한 대 분량이나 나온 부잣집.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정원이 아기자기한 김뢰진가옥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처가댁. 시인은 사랑하는 부인을 무섬마을에 두고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별리(別離)’라는 시로 노래했다. 특이하게도 시인은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입장에서 시를 지었다.

무섬마을의 아이콘은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1972년 시멘트로 잠수교를 놓기 전까지 무섬마을 사람들은 외나무다리를 통해 바깥세상과 소통했다. 외나무다리는 음력 9월9일에 가설하고 이듬해 3월3일에 철거했다. 강물이 불어나는 여름에는 외나무다리가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외나무다리가 없는 여름에는 바지를 홀딱 벗은 후 머리에 이고 건넜지. 강둑을 높이기 전에는 대청마루에 앉아 강을 건너는 사람의 엉덩이만 봐도 누군지 다 알아. 젊은이들은 소 꼬랑지를 잡고 헤엄쳐서 건너기도 했어. 학교 가기 싫어 일부러 물에 빠지는 아이들도 많았지.”

무섬마을 노인들은 요즘도 모이기만 하면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시절의 해프닝을 기억해내고 박장대소한다. 당시 외지인들은 강 건너에 도착하면 폭 30㎝에 길이가 150m나 되는 외나무다리에 주눅부터 들었다고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보지만 강 중간쯤에 도착하면 물살에 어지럼증을 느껴 양팔을 돌리며 균형을 잡다 결국 강물에 처박혀 폭소를 자아냈다고 한다.

무섬마을에 둑을 쌓기 전인 1960년대에는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백사장이 펼쳐졌다. 금빛 모래가 반짝이는 드넓은 백사장은 육지 속의 섬마을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유일한 놀이터이자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꿈을 키우는 무대였다. 그래서 무섬마을 출신 중 수영, 달리기, 씨름, 고기잡이를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는 본래 3개였다. 수도교가 있는 곳에는 영주로 장보러 다니는 외나무다리를 놓았고, 무섬교 자리에는 학교 가는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현재의 외나무다리는 강 건너 논밭으로 오가던 다리.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외나무다리는 2005년 옛 추억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태어났다.

꽃가마 타고 내성천을 건너 시집오면 죽어 꽃상여를 타야만 다시 건널 수 있었던 외나무다리.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던 추억의 외나무다리가 이제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통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