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고향] (1)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함평
입력 2011-09-14 20:47
아버지 믿음의 유산 나비처럼 날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69) 목사와 길을 떠난 건 지난달 19일이었다. 홍 목사가 해외 유학생선교대회 ‘일본 코스타 2011’을 마치고 입국한 다음날이었다. 한국 복음주의 교계의 한 축인 홍 목사의 스케줄은 빡빡하다. 그런 분의 시간을 종일 요청하자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의 고향은 ‘나비축제’로 유명한 전남 함평이다. 인구 3만명이 좀 넘는 한적한 곳. 70년대 농민운동사에 남는 ‘함평고구마사건’ 외엔 딱히 기억에 없는 밋밋한 한촌이었다. 산수도 제대로 된 골 하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이 한촌에 복음의 양식이 들어온 것은 100여년 전. 지금은 90여 교회가 구령에 힘쓰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의 경우 54개 교회가 노회를 구성했을 만큼 복음화율이 높다.
홍 목사는 이날 함평읍내 외곽 가족묘를 찾았다. 조카 홍성표(51·사회복지시설 ‘자광원’ 원장)씨가 추석 추도 예배를 앞두고 벌초를 준비하고 있었다. 홍 목사는 부친 홍순호(1915∼95·함평교회 장로·건국유공자) 묘역에서의 기도가 유난히 깊어 보였다. 고향의 아버지는 성화(聖化)를 향한 관문이자 때론 닫힌 문이었다.
홍 목사를 안다는 이들은 함평의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6·25전쟁 전후 장사 수완이 좋아 돈을 좀 만졌기 때문이지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부잣집은 아니다. 홍순호 장로가 예수 믿으면서 물리가 남들보다 일찍 트이고 이로 인해 재물 축복을 받았다.
열두 살에 교회 종지기였던 홍 장로는 열일곱 살에 집사가 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멸시받던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와 몇몇 청년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전도하고 성경 공부를 했지요. 훗날 국회의원이 된 나판수 어른 등이 ‘함평 자전거부대’였습니다. 물자 귀한 시대에 서울에서 물건 떼다 팔아 돈을 벌기 시작하셨고 읍내에서 제법 큰 의신상회를 하셨습니다.”
어릴 적 홍 목사가 기억하는 집은 ‘꽃동산’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함평교회 자리. 일제 강점기 호남선 학다리역과 함평읍을 연결하는 궤도열차가 있었는데 광복 직후 그 궤도회사의 일본인 적산가옥이 두어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홍 장로 집이 됐던 것. 유리온실과 일본식 정원이 아름다운 집이었다.
홍 장로에게 재산은 ‘다섯 달란트’(마 25:16)였다. 금 다섯 달란트가 열 달란트가 되었고 또 스무 달란트가 되는 식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 돈으로 교회를 세우고 고아원을 짓는 데 썼다. 작고한 신학자 박형룡 목사, 함평읍교회 김병두 목사, 나판수 윤인식 전 국회의원, 이원설 전 한남대 총장 등과 크리스천 리더 그룹을 형성해 복음 전파에 힘썼다.
하지만 전쟁은 ‘부르주아’가 설 자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홍 장로는 가족을 남긴 채 부산으로 급히 피난을 갔고 남은 가족은 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함평은 좌우익 대립으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곳입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붙들고 가난한 이들 구제에 앞장섰기에 전쟁통에 화를 면했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우리 식구는 목포에서 아버지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홍 목사는 근대 문명도시 목포에서 유달초교와 목포중학을 다니며 한 시절을 보낸다. 김지하 시인, 한화갑 전 국회의원, 이석우 경희대 명예교수와 사회사업가 윤기 등이 같이 수학한 동창이다.
한데 아버지라는 거대한 산은 소년 홍정길에게 넘지 못할 벽이자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밀어붙이는 아버지가 유난스러웠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목포에서 함평으로 돌아왔어요. 서울 수복 후 함평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맡아 운영할 사람이 없어서였죠. 당연히 아버지가 맡았지요. 지금의 자광원입니다. 그리고 저도 그 아이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 고아원 아이가 된 거죠. 아버지 성격상 예외가 없었거든요. 목포는 천국이었던 셈이죠.”
아버지는 새벽기도에 다녀오면 매일 예배를 드렸다. ‘제임스 딘’처럼 반항이 몸에 밴 그는 머리 숙이고 기도하다 졸기도 했다. “많이 맞았습니다. 허허.” 또 돈 많은 장로의 아들 눈에 뵈는 교회와 목자의 행태는 부조리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 무렵 이웃한 영광 염산의 바닷가에서 훗날 작가가 되는 송영(70)이 ‘촌구석 선생질’하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하염없이 바닷가만 바라보듯이 홍 목사 또한 도망치고 싶은 고향에 유폐되어 있었다. 청춘에게 고향은, 아버지는 머리 둘 곳이 못 된다. 때문에 서울행은, 철학 전공은 순전히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다.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나 당산나무 밑에서 쪼그리고 잤던 아버지의 신앙 내력을 어린 제가 어떻게 이해했겠습니까. 목사가 됐을 때 ‘네가 목사가 되다니’하시면서 우셨어요. 무던히 속썩이던 자식놈이니 더했겠지요.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면서 꼭 같은 행동을 빠짐없이 하셨는데 의자 들고 문 밖에 나와 ‘홍 목사’ 기다리시는 거였죠.”
그가 고향에 들어서자 “우리 장조카 왔다”며 작은어머니가 반색하며 덥석 손을 잡았다. 아들 홍성표씨와 함께 ‘자광원’을 운영하는 유보영(77) 함평교회 권사였다. 홍 목사는 아버지와 교인이 함평천에서 모래 날라 지은 적벽돌 건물 자광원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젠 근대문화재급이 된 건물이다. 어릴 적 영산홍이 붉게 탔던 정원과 유리온실 갖춘 집은 성전이 돼 자광원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날 관절통으로 고생하는 유 권사는 ‘늙은’ 장조카 목사에게 도가니탕을 대접했다.
●홍정길 목사
고 옥한흠 하용조, 이동원 목사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복음주의 목회자. 숭실대 철학과 총신대 대학원 졸업. 대학 동기들에게 “그 친구가 목사됐어?”란 소릴 들을 정도로 반항하는 삶을 살았다. 1965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가평 입석캠프에서 회심했다. 남서울은혜교회 목사가 된 후 강남 수서 장애인학교 밀알학교를 설립·운영하는 한편 북한 및 중국 동포 선교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유학생 선교단체 코스타를 이끌고 있다. 내년 은퇴를 앞두고 경기도 가평에 선교사 은퇴마을을 준비 중이다.
●말하다
“9형제 대식구였다. 여동생 은선이 소아마비였다. 미국 갔다가 장애인도 일하는 거 보고 놀랐다.”(장애인 교육 ‘밀알학교’ 세운 이유를 설명하며)
“외할머니 기도로 목사가 됐다. 외할머니는 신사참배 반대하다 대전 감옥에 수감됐다가 풀려나 1945년 부활절에 소천하셨다. 두 달 동안 외할머니와 지냈는데 불과 네 살이었다. 한데 외손자 좋은 목사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소리가 너무나 커 지금도 명징하다.”(목사 된 이유를 설명하며.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홍군은 남의 생각을 빌어서 예수 안 믿는가.”(홍 목사가 CCC 캠프에서 예수 안 믿어진다며 따지고 들자 김준곤 목사가 한 말)
“목회자는 자녀와 돈 문제 앞에서 일반 사람과 달라야 한다. 성도는 직장생활에서 일반 직장인과 다른 열매가 있어야 한다.”(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을 언급하며)
함평=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