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효자 탕자
입력 2011-09-14 20:33
누가복음 15장 25∼32절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기쁨을 강조하는 데 갈수록 초점이 좁혀집니다. 백 마리의 양들 중에 한 마리, 열 개의 동전 중에 한 닢, 두 아들 중에 한 아들. 잃어버린 대상을 영사기로 스크린에 비춘다고 가정할 경우, 1%(1/100), 10%(1/10), 50%(1/2)로 점차 확대되다가 마지막으로 화면 전체를 100% 꽉 채우게 될 때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잃어버린 그 최후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탕자의 비유의 후반부에서 맏아들은 누가 봐도 효자입니다. 벌써 등장할 때부터 하루 종일 일터에 나가서 일만 하다가 귀가하는 성실한 일꾼입니다. 모범생이지요. 하지만 그는 패륜아인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베푼 잔치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도 집을 떠난 적도,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도 없는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탕자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다니!
큰아들에게는 피붙이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고 길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나 아들이지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놈이 말아먹은 재산과 방탕한 행위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장자라는 위치와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아버지를 모시고 겉으로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 잘하는 효자처럼 보였지만 마음은 동생이 창기와 놀아나는 ‘먼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주변 시선 때문에 억지로 아버지의 집을 지켰지만 그의 마음은 때로 상상의 나래를 편 채 각종 안테나를 총동원해 탕자의 신바람 나는 향락을 부러워했습니다. 큰아들의 문제점은 한 번도 자유와 기쁨으로 아버지를 섬기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집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과는 아랑곳없이 아버지의 집에 거했습니다.
탕자는 둘입니다. 불효자와 효자 모두가 탕자들입니다. 더 고약한 탕자는 효자 탕자입니다. 비유를 듣는 원 청중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탁교제를 나누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누가 봐도 종교 엘리트요 경건하고 신심 깊기로 소문났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바로 그들이 풀 스크린으로 화면을 가득 메울 최후의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필립 얀시는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안겨주는 역설적인 의원병이 있듯이 경건병도 있다고 했습니다. 경건병은 너무 기도를 많이 하고 너무 성경을 많이 읽고 너무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이들이 걸리는 병입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들은 너무 의롭기 때문에 십자가만 붙들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맡았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자기 역시 둘째와 마찬가지로 탕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정죄하기 바쁩니다. 가장 역설적이면서 집요하고 은폐되기 쉽고 무서운 죄이지요!
오늘 한국교회에서도 한 번도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어겨본 적이 없다는 자타칭 엘리트 교인들이 자기야말로 들판을 헤매고 있는 그 어느 양 못지않게, 사라진 그 어느 동전 못지않게, 저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그 어느 탕자 못지않게 길 잃은 자임을 고백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김흥규 인천 내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