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종석 (7) 장로 피택후 6개월 교육… 그럼에도 교만이 ‘불쑥’
입력 2011-09-14 17:51
충현교회는 1975년부터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서울 역삼동에 있지만 당시만 해도 충현교회는 충무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한일병원 레지던트 교육과정에 있을 때 처가가 교회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충현교회를 다녔던 것 같다. 초창기 충현교회 하면 김창인 목사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몹시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강단에서 설교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목사님의 설교는 철저히 성경 본문 중심이었다. 설교 본론에 들어가기 전엔 항상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해 말씀해 주셨다. 큰제목 1, 2, 3번이 나오고 거기에 따라 소제목 1, 2, 3번이 따라 나오는 식이었다. 본론에서는 철저히 십자가 복음으로 성도들을 무장시키셨다. 얼마나 죄를 호되게 나무라시는지 성도들 눈에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호된 질책과 권면의 설교를 계속하시다가도 결론은 대부분 위로의 말씀으로 맺으셨다. 그런 목사님의 설교는 성도들의 심금을 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목사님의 표현력이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복음을 앞세우고 강조하시는 데 있었다. 그때 느꼈던 것은 교회 부흥은 조직이나 행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주는 십자가 복음에 있다는 사실이다. 충현교회가 한창 부흥할 때는 경향 각처에서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늘의 충현교회 초석은 그 당시에 놓인 것이다. 복음을 앞세운 교회만이 진정한 영향력이 있고 부흥한다는 것을 충현교회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내 신앙생활은 주일예배 출석에 만족하는 정도였다. 국립의료원으로 가면서 봉사를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주변 성도들과도 서먹한 사이였다. 당시 충현교회는 지금의 역삼동에 부지를 사서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장로후보에 피택돼 약 6개월간의 장로교육을 받았고, 마지막 구술시험과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구술시험에 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나 같은 사람은 장로가 될 자격이 없다. 만약 내가 장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나를 흔들어대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우려하고 있었다. 또한 나를 면접하려는 장로의 모습과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사람도 장로가 되는구나’라는 교만한 생각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고 났더니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들이 닥쳐왔다. 이미 밝혔듯이 노모와 큰딸이 연거푸 연탄가스에 중독돼 겨우 살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창인 목사님이 ‘몸이 불편하시다’며 나를 찾으셨다. 목사님 댁으로 왕진을 갔더니 목사님은 각혈을 하고 계셨다. 새빨간 피를 반 컵 정도나 쏟으셨다. 직감적으로 폐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속으로 ‘내가 불순종하니까 목사님께서 저런 고난을 당하시는구나’ 생각했다.
당시 국립의료원 흉부외과 과장이신 유회성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출혈을 멈추려면 폐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김 목사님은 “수술하면 설교에는 지장이 없는가?”라고 물으셨다. ‘설교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그러면 나 수술 안 해”라고 하시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셨다. 목사님은 그 후론 두 번 다시는 흉부외과를 찾지 않으셨다. 목사님은 광혜내과의원에서 항결핵제로 치료받으시고 회복해 가셨다. 지금 93세가 될 때까지 건재하신 것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