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서울역 그릴
입력 2011-09-13 17:38
한동안 비행기와 고속버스에 밀렸던 철도가 KTX 개통 후 각광받고 있다. 국내 노선에서는 편리함이나 속도, 안전성에서 철도를 따를 자가 없다. 추석 귀성길에 찾은 서울역은 이전과 다른 두 가지 풍경으로 여행자를 맞고 있었다.
먼저 ‘문화역 서울 284’라는 곳이다. 옛 서울역사 자리에 들어선 문화공간이다. 1988년 민자역사가 들어서면서 역의 기능을 잃자 1993년 서울역 문화관, 1997년 철도박물관으로 쓰이다가 지난 8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지향점으로서의 문화, 지역성을 나타내는 서울, 여기에 사적번호를 붙인 이름이다.
‘문화역 서울 284’는 서울역의 역사를 예술작품과 함께 보여주는 추억의 곳간이다. 이상의 ‘날개’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영화 ‘마부’에 등장하는 곳, 식민시대의 아픔과 근대문화의 기억이 중첩되는 곳을 1925년 경성역 모습대로 복원했다.
1층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12개의 석재기둥과 돔으로 구성된 중앙홀을 만난다. 매표소와 대합실, TMO(국군여행장병안내소), 매점 등이 있던 1층에는 작가 이불의 설치작품이 매달렸고, 천창(天窓)에는 강강술래를 형상화한 조광호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나머지는 비웠다. 언젠가 기차역의 기능을 다시 수행할 수 있도록 문화인들이 예지를 발휘한 것이다.
관심사는 2층이다. 1970년대 후반에 서양식 레스토랑의 상징이었던 그릴 때문이다. 그곳은 늘 하얀 천이 씌워진 의자에, 테이블 역시 하얀 보로 덮여져 있었다. 그곳에서 난생 처음 돈까스를 먹고 함박스테이크를 썰었다. 음식을 먹고 빳빳한 냅킨으로 입을 닦을 때의 상쾌함이란.
이런 장면을 떠올리며 2층 문을 열었으나 보이는 것은 텅 빈 공간뿐이니 이번에는 너무 비웠다. 저 멀리 무슨 설치작품이 보였으나 옛 사랑의 추억을 대신하기엔 부족했다. 문화재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커피와 전통차 정도를 팔아 살아있는 공간으로 꾸몄으면 좋겠다.
서울역의 바깥 풍경을 바꾼 것은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다. 1919년 9월 2일, 부임하는 일본 총독 사이토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의사의 동상이 높이 4m 90㎝ 크기로 거사 현장에 세워졌다. 조각가 심정수가 두루마기 차림의 강 의사가 폭탄을 던지려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서울역은 늘 분주한 곳이지만 이제 문화스테이션과 강우규 동상을 보기 위해 시간을 좀 내놓아도 좋겠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