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김진희] 9·11 그후, 폐쇄적 제국의 부활

입력 2011-09-13 17:49


9·11 이후 10년이 지났다. 레이저빔이 뉴욕의 밤을 밝혔다. 주저앉은 쌍둥이 빌딩의 위용이 빛줄기로 살아나는 듯했다. 미국인들은 손상된 자존심의 회복을 기원했을 것이고,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얼굴을 애틋하게 그려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3000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일반 시민의 죽음을 목도한 미국인들에게 2001년 9월 11일은 잊을 수 없는 집단적 고통이자 트라우마였다. 정체성에 대한 반문이 중심에 있었다. 혼란과 슬픔의 와중에 그들은 길거리의 은유시인 빔 벤더스 감독 영화처럼 ‘왜 중동인들이 미국을 증오하는가’, 혹은 새뮤얼 헌팅턴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일 수 없었다. 정체성의 재편이 첨예한 논쟁지대(contested terrain)를 낳았다.

美 정치 양극화 심화되고

헌팅턴이 ‘앵글로-색슨 기독교주의’로 거듭날 것을 강조하면서 관대한 이민정책을 비판할 때, 코넬 웨스트는 다문화주의를 상징하는 ‘블루스’에서 민주주의를 되살릴 방법을 찾자고 말했다. 아랍-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무차별적 비난이 쏟아질 때 탈식민주의 연구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왜 누군가 테러를 자행해야 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테러와의 전쟁은 제국주의의 알리바이가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대답은 간결했다. “미국의 자유를 시기한 ‘그들’이 우리를 증오한다”는 것이었다. 9·11을 시기와 증오로 규정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정치문화와 담론은 빠르게 재편성되었다. 테러 직후 그나마 호소력을 가졌던 목소리, ‘복수 아닌 평화!’는 점차 잦아들었다.

부시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집단적 공포심리를 동원해 강경 보수정치로 선회했다. 국민의 공적 삶의 질을 보장하던 돈은 전쟁비용으로 쓰였고 국민의 프라이버시가 항시적으로 침해되었다. 9·11 테러는 미국의 국수주의, 인종적 쇼비니즘, 기독교적 우월성에 대한 환상을 되살렸다. 100년 전 앵글로색슨 중심주의로 돌아간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포용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지난 10년간은 ‘폐쇄적 제국’으로 귀환했다. 아랍계 미국인들이 겪었던 차별이 바로 그 변화를 집약한다. 2004년 헌팅턴의 저서 ‘우리는 누구인가’가 출간되었을 때, 양식 있는 시민들은 백인·기독교 우월주의를 대변한다고 비난했지만, 2009년 티파티의 등장에서 목격하듯 평균적 미국인들이 느끼는 현실적 체감온도는 헌팅턴의 주장에 가까웠다.

천문학적 전쟁비용을 쏟아부은 결과 오사마 빈라덴은 사살됐고, 알카에다 세력은 약화됐다. 미국의 대테러 능력 역시 크게 향상했다. 그러나 막대한 군사력을 사용하고도 미국이 원했던 그 승리를 완결하지 못함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이 제한적임을 입증하는 역설에 봉착했다. 미국의 지정학적, 지경학적 위상이 강해졌다고 볼 수도 없다. 미국은 중동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군사개입을 정당화하고자 했지만 중동국가들의 정치는 독자적인 원리로 굴러가고 있다.

공적 영역은 심하게 훼손돼

얻은 것은 상처였고 균열이었다. 미국 내 정치문화의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미국의 공적 영역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자국인의 집단적 살상을 정당성의 근거로 삼아 시작된 전쟁은 훨씬 더 많은 인명피해와 전쟁비용을 요구했다. 뉴욕의 밤하늘을 밝힌 두 줄기의 레이저빔은 지상에서 가장 비싼 퍼포먼스다.

‘응징에서 평화’로 건너가는 길은 막혔는가. 앵글로색슨 중심주의적 해결방식은 여전히 오바마 행정부를 가두고 있는 폐쇄회로다. 워싱턴을 옥죄는 이 ‘폐쇄적 제국’을 열어젖히지 못하는 한 21세기의 지구촌 평화는 요원하다.

김진희 경희사이버대 미국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