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 장편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 상상 속 상상 문학의 프리뮤직

입력 2011-09-09 16:15


‘프리 뮤직’은 엄격한 구성적 작법을 따르지 않고 즉흥적으로 떠오는 악상을 자유롭게 연주하는 음악을 말한다. 즉흥적인 영감과 자유롭고 실험적인 변칙을 특징으로 하는 프리 뮤직은 청중들의 의식을 해방시키며 감성의 층위를 확장시킨다. 소설가 정영문(46)의 장편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는 문학의 프리 뮤직에 해당한다. 작가는 서두에서 “이 소설은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0년 봄부터 여름까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쓴 것으로, 일종의 체류기인 동시에 표류기에 가깝다”고 밝히고 있다. 왜 표류기인가. 작가의 말을 들어본다.

“나는 이 도시에 머물면서 되도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려 하지 않았는데 특별히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라고 소설의 성격을 설명한다. 소설은 옛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의 기억과 그로부터 5년 이 지난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이야기로 나뉘지만 5년이라는 시간의 단절은 큰 의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뚜렷한 플롯도 없다. 아니, 플롯이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옛 여자 친구와 그녀의 남자 친구였던 멕시코계 사내와 함께 한 시절을 보냈다는 설정이 있을 뿐이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인 사내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떠올리며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것은 화염에 휩싸인 새 문신이었다. 무슨 새인지 본인도 모르는 새는, 그냥 새였고, 팔색조처럼 화려했지만 작았고, 불사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불에 그슬린 것 같은 새는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구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새를 보며 그것이 언젠가는 그의 팔에서 불사조처럼 날아오르는 대신 완전한 숯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10쪽)

‘나’는 세계와 내면 사이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한다고 믿는, 깊은 심연에 대해 끊임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뿐이다. 그 중얼거림은 순전히 ‘나’의 상상이 빚어낸 ‘어떤 작위의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상상은 무엇을 향해 나아간다는 방향성도 없다. 이른바 정영문식 상상은 뜬구름처럼 무목적적이다. 이 소설의 프리 뮤직적인 특징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정영문 자신이 화자인 ‘나’로 등장하고 있다고 해도 이 소설이 정영문의 자전 소설은 아니라는 점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작가의 상상력이 화자의 상상력으로 이입되는 순간, 정영문은 없어지고 화자만 남게 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사실성의 구속에서 벗어나 있다. 소설의 모든 장면들은 정영문 자신만의 상상이 아니라 작가와 화자가 주고받는 상상 속의 상상이다. 상상은 늘 현실 세계를 뛰어넘는다. 상상은 관념적인 것에서 시작해 점점 구체적인 것으로 환치된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진술한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얼마나 무료했는지를 생각했고, 너무도 무료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소설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에 대한 나의 어떤 생각들에 대한 것인 것 마냥 쓴 이 소설 전체가 내가 느낀 어떤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지겨움을 길게 표현한 것이었다.”(265쪽)

상상 속의 상상, 꿈속의 꿈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나’가, 그리고 작가 자신이 그런 상상들을 했다는 것뿐이다. 정신이 지니고 있는 유희에 대한 어떤 끈

질긴 욕망의 산물이기도 한 상상은 글쓰기로 이어지고 소설로 구현되기에 이른다. 유효하지 않으나 유효성을 잃지 않은 상상을 토대로, 무의미하지만 바로 그 무의미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소설이 ‘어떤 작위의 세계’다. 정영문의 ‘프리 뮤직’은 세계의 무의미에 대해 문학의 무의미로 대적하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불협화음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