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종석 (5) 3차례 시험끝에 드디어 ‘내분비 전문의’ 획득

입력 2011-09-08 17:40


프랑스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되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3회에 걸쳐 내분비학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시상하부 뇌하수체 계통의 분야, 갑상선을 비롯한 소화기외과 호르몬 분야, 여성호르몬 분야, 이 세 분야의 수련을 거친 후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될 수 있었다. 피티에 살페트리에 의대 병원은 정신과 질환 연구와 진료에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병원은 프랑스 의사 셸리(Schally)가 세계 처음으로 시상하부호르몬을 측정해 의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할 만큼 내분비학 분야 연구가 수준급이었다.

내가 프랑스 유학을 갈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인체 호르몬 측정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 내분비학 연구에 지장이 많았다. 당시 파리에는 파스퇴르연구소가 있었다. 샘플만 그곳에 보내면 짧은 시간 내에 인체 호르몬 등에 대한 결과가 전송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 같은 첨단 시스템은 얼마 후 한국에도 도입돼 녹십자 같은 여러 의료기관이 내분비 대사 질환 연구를 시작했다.

귀국 후 난 국립의료원 내과 의사로 있으면서 보사부(현 보건복지부) 차관을 했던 나도헌 선생님의 권유로 핵의학과를 처음 개설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이 분야를 다룰 수 있는 특수면허증을 갖고 있었다. 핵의학과가 독립되어 있긴 했지만 나 자신이 내과 전문의이기 때문에 내과와 핵의학과 환자를 병행 진료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고 이문호 선생님이 핵의학과를 처음 도입하셨을 때 핵의학은 의학계에서 ‘신비스런 신학문’으로 통했다.

혈액학의 권위자이셨던 이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갑상선에 대한 관심이 점점 깊어갔다. 무엇보다 호르몬의 변동으로 인해 병이 생기고 낫기도 하는 형이상학적인 특성 때문에 흥미가 있었다. 갑상선 질환은 전염병과 같이 정확히 진단만 되면 치료가 가능한 질환이기 때문에 더 매력이 있었다. 1974년부터 10년간 국립의료원 내과 스태프로, 핵의학과장을 거친 후 지금의 서울광혜내과의원을 서울 역삼동에 개설해 지금까지 진료를 해오고 있다. 요즘 갑상선 전문클리닉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갑상선 전문클리닉이 없다는 것은 이 분야 의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만 해도 여러 곳에 세계적인 갑상선클리닉이 있다. 벳푸, 도쿄, 구마나 등에 있는 갑상선클리닉이 내놓은 논문은 세계적인 잡지에 수록될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

요즘 흥미로운 하나의 현상은 각종 암전문병원이 진료하는 환자 대부분이 갑상선암 환자라는 것이다. 물론 첨단기기의 개발로 비교적 조기에 갑상선암을 쉽게 발견하기 때문에 수술하는 예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병원의 경우 3500여 환자의 통계 분석을 보면 갑상선암으로 진단된 예는 10% 내외였다. 이 결과는 종합병원의 통계와는 다르겠지만 갑상선암 환자가 늘고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1984년 지금의 서울광혜내과 병원을 지어놓고 얼마 안돼 내게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당시 종암동에 살 때 큰딸이 겨울에 연탄가스에 중독돼 응급실에 실려가 간신히 살아났다. 얼마 뒤 80대 노모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 직전까지 갔다. 한숨을 돌리기도 잠시, 1986년 4월 갑작스럽게 심장 통증을 호소하던 아내는 심장판막증 수술을 하던 중 의료 사고로 나보다 먼저 천국으로 떠났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