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학번 ‘끼인 세대’가 되살아나다… ‘사랑, 그 녀석’ 발표한 소설가 한차현

입력 2011-09-07 17:50


세기말인 1990년대 젊은이들의 풍속도가 소설가 한차현(41)에 의해 ‘사랑, 그 녀석’(열림원)이라는 장편소설로 복원됐다.

문화사적 관점에서 90년대 세대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2000년 이후 세대들에게는 다만 어설펐던 자유의 시대의 주인공으로 치부되는 반면 격동의 80년대를 겪은 세대들로부터는 끊임없이 시대적 정체성을 추궁당하는 어정쩡한 ‘끼인 세대’인 것이다. 90년대에 스무 살 꽃다운 청춘을 보낸 이들 ‘끼인 세대’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소설은 작가와 이름이 같은 90학번 ‘차현’이 인생 최초의 연애를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해 초여름, 남보다 빨리 서른일곱이나 마흔넷 정도로 건너뛰는 방법이 혹시 있지 않을까 종종 궁리하던 90학번. 그리고 세상에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적어도 한 명 있었어요. 88학번 3학년, 연상연하 커플이란 게 드문 데다 여간 조심스럽지 않은 때였거든요”(9쪽)

주인공의 감정선을 표출하기 위해 작가는 90년대 대중문화를 수놓았던 구체적인 아이콘을 등장시킨다. 차현이 늘 꽂고 다니는 헤드폰에서는 이상은, 015B, 이문세, 서태지와 아이들, 솔리드, 그리고 HOT와 핑클에 이르기까지 90년대에 유행했던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그뿐 아니다. 90년대에 극장에 걸렸던 영화제목, 당시 신문기사의 헤드라인도 무시로 인용된다. “요즘처럼 ‘멀티’도 ‘메가’도 아닌 극장들을 누비며 ‘죽은 시인의 사회’를 ‘칵테일’을 ‘달콤한 신부들’을 ‘예스 마담’을 ‘붉은 옥수수밭’을 봤습니다. 영화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달콤 눅눅한 극장 공기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있잖아요 비밀이에요’를 ‘불가사리’를 ‘장군의 아들’을 ‘남부군’을 봤습니다.”(12쪽)

차현의 개인적 체험은 사회적 체험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조선대 이철규와 중앙대 이내창의 변사체가 잇따라 발견되고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지명수배 전단이 교내 곳곳에 나붙고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동의대에서 진압경찰 7명이 숨진다. 5공 특위에 불려나왔다가 어물쩍 퇴장하는 전두환을 향해 민주당 초선의원 노무현이 집어든 명패와 함께 시작된 대망의 90년대는 확실히 80년대와는 달랐다.

차현은 “무엇을 하건 어정쩡하고 무엇을 꿈꾸건 너절했으니 그것이 90년대. 80년대가 격렬했다면 90년대는 야비했습니다”라고 진술한다. 그가 말하는 ‘야비’란 90년대의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도 불구, 개인적 사랑의 가치로 회귀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다. “1990년. 돌이켜보건대 그래도 잘했던 건 미림 선배를 사랑했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 세상에 그만한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훗날 그림엽서나 열쇠고리 같은 기념품 하나 남는 것도 없지만.”(34쪽)

“‘사랑’이야말로 90년대 세대가 발견한 거대한 실재”라고 말하는 소설가 한차현은 사랑이라는 실재를 축으로 삼아 모든 세대를 관통해보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90년대에 갓 대학에 입학해 이제 막 마흔을 넘긴 이들 ‘끼인 세대’들이 자신들이 향유했던 문화와 사랑을 하나의 정당한 현상으로 되살려보고자 하는 간절하고 맹렬한 자기 증명으로 읽힌다.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인터넷 교보문고에 일일 연재된 작품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