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겉과 속] ‘숙소’ 가족에 내준 건 후원금을 집안 살림에 보탠 꼴
입력 2011-09-07 21:51
국민일보, 18대 국회의원 사용내역 최초 분석·공개
“술값과 동창회비 등만 (정치자금으로) 안 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정치자금 지출내역을 취재하기 위해 만난 한 국회의원 회계책임자가 반문한 말이다. 정치자금법은 사적 경비와 부정한 용도의 지출을 금하고 있다. 법 제2조 제3항은 개인채무, 동호회 회비 등 4가지 유형의 사적경비 가운데 가계의 지원·보조를 가장 먼저 지목하고 있다. 지지자들이 건넨 후원금 등으로 집안 살림에 보태지 말라는 뜻이다. 국민일보는 이 조항에 의거, 국회의원이 정치자금으로 빌린 집들을 하나씩 검증했다. 현장취재가 시작되자 의원들은 “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괜찮다고 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검증 결과 선관위에 ‘의정활동용’이라고 신고한 주택이 실제로는 가족의 사적인 거주 용도로 활용되거나 사실상 빈 집으로 버려지는 등 정치후원금이 오·남용되고 있는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정활동용 숙소를 딸 자취집으로 내준 의원들의 변명=거제 선관위도 올 초 한나라당 윤영(경남 거제) 의원이 제출한 정치자금 수입·지출보고서 내역 가운데 지역숙소 월세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본보가 확인한 선관위 현장조사 결과보고서엔 ‘이상없음’으로 기재돼 있었다. 거제 선관위는 윤 의원에 대한 취재가 시작되자 뒤늦게 윤 의원 측에 “딸이 출퇴근용으로 지역구 숙소를 이용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윤 의원은 “선관위에 문의하니 지역관사 렌트(임대료)는 정치자금으로 낼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의원이 되기 이전인 2005년부터 거기 살았는데 최근 선관위에서 ‘가족이 살면 안 된다’고 알려와 (올 초) 이사한 뒤부터는 내 돈으로 (임대료를) 내고 있다. 딸이 살면 안 된다는 인식은 못했다. 그럼 선관위에서 (처음부터) 혼자 살라고 얘기를 해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반문했다.
자유선진당 이재선(대전 서을) 의원은 전화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 의원이 지역숙소로 석 달간 빌린 서울 청담동 오피스텔 관계자는 “이 의원이 직접 전세계약을 하시길래 본인이 사실 줄 알았는데 본인이 아니라 자녀 분이 사셔서 이상하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이 의원실 관계자도 “KTX를 타면 1시간 거리라 이 의원은 항상 대전 자택에서 주무신다”고 실토했다.
◇월세 지급 1위 이인기 의원=다선의원일수록 지역숙소를 둔 의원 비율이 높았던 반면 서울에 연고가 없는 초선의원들의 경우 정치자금으로 서울숙소를 빌리는 경향이 짙었다.
재선인 민주당 박주선(광주 동구)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광주 학동에 월세 30만원짜리 삼익세라믹아파트를 지역숙소로 택했다. 박 의원 지역사무소 관계자는 “의원 자택이 분당이라 광주에 올 때마다 잠을 자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선거사무실과 가깝기도 하지만 지역구내 어려운 분들이 많아 지역정서를 고려한 부분도 있다”고 설명했다.
초선인 한나라당 조원진(대구 달서병) 의원은 국회 앞에 위치한 여의도 더샵아일랜드파크 오피스텔을 서울숙소로 택했다. 같은 당 초선인 조전혁(인천 남동을) 의원도 서울 일정이 많을 경우 국회 앞 진미파라곤에서 묵는다. 조 의원실 관계자는 “회기 중 늦게 끝나거나 서울 4대문안 호텔에서 개최되는 조찬모임에 참석하기도 편리해서 국회 앞 오피스텔을 서울숙소로 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과 지역숙소를 빌린 의원 가운데는 월세만 정치자금으로 쓰고, 보증금은 자비로 내는 등 씀씀이 유형이 제각각이었다. 다만 월세 기준으로 가장 비싼 숙소를 쓴 의원은 한나라당 이인기(경북 고령·성주·칠곡) 의원으로 나타났다. 이 의원은 여의도 더샵아일랜드파크 오피스텔에 매달 정치자금으로 198만원씩 지불했다.
◇의원들, 의정활동용 숙소 왜 만드나=서울과 지역에 숙소를 빌리는 의원의 목적과 유형은 다양하다. 유권자 시선을 고려해 국회의원 당선 전에 살던 넓은 집을 버리고, 20년 이상 된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하는 등 눈치보기형이 있는가 하면 내 집 없이 필요에 따라 전·월세로 이사를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대해 한 의원실 관계자는 “‘지역경제를 살리겠다고 해서 당선시켜준 의원이 서울에만 집을 사고, 주택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우리 지역구에는 집 한 채 없다는 지역언론 보도를 의식해 빈집이라도 지역구에 집을 둘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실제로 취재진이 방문한 대구의 이한구 의원과 서상기 의원(이상 한나라당), 광주의 조영택 의원(민주당) 등의 경우 거의 빈집으로 방치돼 있었다.
국회는 2005년 지방출신 국회의원들의 숙소마련을 위해 서울 마포에 10평 크기의 오피스텔을 여러 채 계약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국회 내부에서 의견 통일이 이뤄지지 않자 계획을 철회했다.
탐사기획팀(indepth@kmib.co.kr)
정승훈 차장(shjung@kmib.co.kr) 김지방 차장(fattykim@kmib.co.kr) 정동권 기자(danchung@kmib.co.kr)